1930년대 일본 군부는 이미 문민통제에서 크게 벗어난 상태였다.
"1931년 만주에서 벌어진 음모(만주사변-필자)는 군부가 독단적으로 행동해도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32년 총리, 재무대신, 산업가들이 살해당했을 때 일본에서는 실질적으로 의회주의 통치가 막을 내렸다." (주석 5)
정치군인들의 불장난이 동양평화를 유린하고 결국 자기 나라를 파멸시킨다는 사례로 꼽힌다.
만주침략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일본 군부는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외곽 마르코폴로 다리에서 중국군을 공격함으로써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하여 항일전을 치르기로 합의, 서명한 지 이틀 후였다. 결국 중일전쟁의 최대 수혜국은 소련이었고 최대 수혜자는 모택동이 되었다. 1937년 가을 중일전쟁이 대륙 전역으로 확대되었을 때 모택동은 휘하의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일전쟁은 중국 공산당이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의 계획은 세력 확대에 70%, 정치에 20%, 일본과 싸우는 데 10퍼센트의 노력을 쏟는 것입니다. 이런 계획은 3단계로 수행될 것입니다. 제1단계에서 우리는 국민당과 협력하여 우리의 존립과 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제2단계에서는 국민당과 동등한 세력을 갖도록 매진해야 합니다. 제3단계에서는 중국의 전역에 깊이 침투하여 국민당에 반격을 가할 만한 기반을 확립해야 합니다. (주석 6)
모택동의 전략은 어김없이 실천되었고 적중하였고, 결과적으로 공산당은 12년 후인 1949년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축출되었다. 일제의 중국침략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모택동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큰 흐름과는 상관없이 중국 대륙은 여전히 장개석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고, 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 역시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오래 전부터 이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였다. 일제 군부의 야욕과는 달리 조국 해방의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 본 때문이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한 지 5개월 여 만인 1937년 1월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민족혁명당은 김성숙 중심의 조선민족해방운동자연맹, 최창익 등의 조선청년전위동맹, 유자명 등의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독립운동 세력이 좌우 양대 진영으로 크게 재편된 셈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좌우진영은 통합과 연대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1939년 5월 10일 우익의 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대표한 김구와 좌익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대표하여 김원봉이 「동지ㆍ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을 발표하고, 양대 진영이 합치는 전국연합전선협회를 구성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과거 수십년 간 우리 민족운동사상의 파벌항쟁으로 인한 참담한 실패의 경험과 목전의 중국혁명의 최후의 필승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는 민족적 총단결의 교훈에서 종래 범한 종종의 오류·착오를 통감하고, 이제 양인은 신성한 조선민족해방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장래에 동심·협력할 것을 동지·동포 제군 앞에 고백하는 동시에 목전의 내외 정세 및 현단계에 있어서 우리들의 정치적 주장을 이하에 진술한다.
1.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한다.
2.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하고 민주공화제를 건설한다.
3. 국내에 있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공사재산 및 매국적 친일파의 일체 재산을 몰수한다.
4. 공업ㆍ운수ㆍ은행 및 기타 산업부문에 있어서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는 각 기업을 국유로 한다.
5.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으로 하고 토지의 일체 매매를 금지한다.
6. 노동시간을 감소하고 노동에 관계하고 있는 각 종업원은 보험을 실시한다.
7. 부녀의 정치·경제·사회상의 권리 및 지위를 남녀 같이 한다.
8.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를 향유한다.
9. 국민의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을 국가의 경비로 실시한다.
10. 자유·평등·상후부조의 원칙에 의거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촉진한다.
두 사람의 연명 성명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은 당분간 이루어지지 못하고, 우파 진영만의 반쪽 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좌우 진영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공동성명 채택과 그 내용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해방 후의 토지문제 등에 있어서는 김구가 김원봉의 이념과 정책을 상당부분 수용하였다. 얼마 후 임시정부 산하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고 김원봉이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좌우통합 정부가 수립되었다.
20년대 중후반부터 제기되어 온 '민족유일당운동'이 이제야 성립된 셈이다. 두 지도자는 합의한 10개의 정치강령을 제시했다. 신익희는 선전위원으로서 '정치강령' 등 주요 문건의 기초에 참여하였다.
정치강령
①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전복하여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한다.
② 봉건세력 및 일체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민주공화제를 건설한다.
③ 국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의 공ㆍ사 재산 및 매국적 친일파의 일체 재산을 몰수한다.
④ 공업ㆍ운수ㆍ은행과 기타 산업 부분에서 국가적 위기가 있을 경우 각 기업을 국유로 한다.
⑤ 토지는 농민에 분배하고 토지의 일체 매매를 금지한다. 조선농민의 대부분은 소작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 토지 및 친일적 대주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다. 그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여 그대로 농민에 분배하고 매매를 금지한다.
⑥ 노동시간을 감소하고 노동에 관계하는 각 종원에게는 보험사업을 실시한다.
⑦ 부녀의 정치ㆍ사회상의 권리 및 지위를 남녀 동등으로 한다.
⑧ 국민은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ㆍ신앙의 자유를 향유한다.
⑨ 국민의 의무교육과 직업교육을 국가의 경비로서 실시한다.
⑩ 자유ㆍ평등ㆍ상호부조의 원칙에 기초하여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촉진한다. (주석 7)
두 거두의 「동지ㆍ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도 소개한다.
동지ㆍ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
우리 민족은 현재 생사의 관두에 몰려 있다. 우리들은 일치 단결하여 통일된 운명에서 통일된 목표를 향해 분투해야 하는 동지이고 동포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이미 각 소단체의 분립 투쟁으로 인한 민족적 손해를 경험하고 통일단체에 의한 광명을 발견한 이상, 한시 바삐 완전하게 일체가 되어 단결하지 못한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 없음을 확신한다.
우리 두 사람은 개인의 의견으로써 뿐만 아니라 용감히 분투하고 있는 다수 동지의 일치된 의견 위에 해외에 있는 다수 동지ㆍ동포와 함께 먼저 관내운동 조직의 계획적 변혁과 광명을 가진 새로운 국면의 창조를 향하여, 절대적인 자신과 용기를 갖고 나아가려 한다. (주석 8)
주석
5> 폴 존슨, 조윤정 역, 『모던타임스(1)』, 580쪽, 살림, 2008.
6> 앞의 책, 590쪽.
7>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2)』, 639쪽.
8>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사상부, 『사상휘보』20, 251쪽, 193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