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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의 큰별 강창덕 선생(95)이 3일 향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진은 강창덕 선생이 원로회의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습.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의 큰별 강창덕 선생(95)이 3일 향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진은 강창덕 선생이 원로회의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습.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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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등 평생을 통일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강창덕 (사)4.9인혁재단 이사장 겸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3일 오후 투병 중이던 영남대의료원에서 향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27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고 강창덕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 17살의 나이로 반일사상 고취 혐의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45년에는 일본해군지원병 입대를 피해 도피하다 구속되었다.

광복 후인 1952년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남일보와 대구 매일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

1960년 사회대중당 경산군당위원장을 맡아 제5대 민의원에 출마하고 1967년에는 '반독재 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 추진위원회' 활동과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상임공동의장, 1993년 경산민우회 초대회장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선생은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상임고문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구북구회장, 남북평화나눔본부 고문, 한국진보연대 중앙본부 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등을 맡아 마지막까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특히 1974년에는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구속돼 고문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8년8개월을 복역하는 등 반일, 통일, 민주화운동 등으로 모두 7차례에 걸쳐 13년간 투옥돼 복역했다.

이후 2006년 국무총리실 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훼복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2007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선생은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사형선고를 당한 후 해마다 열리는 추모제에서 "혼자 남아 죄송하다"며 "동지들을 대신해 통일을 앞당기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고 강창덕 선생은 그의 호인 '야성(野星)'처럼 들불처럼 살면서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며 평생을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해왔다. 또 후배들의 가슴에 행동으로 보여준 스승으로 남아 있다.

강창덕 선생이 별세하자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은 이날 논평을 통해 "강창덕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7차례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으면서도 민주화와 자주평화통일의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이어 "고인께서 행동으로 보여주신 민주주의를 향한 진심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며 "편히 쉬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

한편 고 강창덕 선생의 빈소는 대구전문장례식장 201호에 차려질 예정이고 발인은 오는 6일 예정이다.

#강창덕#통일운동#민주화운동#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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