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언론 징벌적 손배제 도입'에 찬성하는 글을 이봉수 세명대저널리즘스쿨 교수가 보내왔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에 대한 반대 주장도 환영합니다.[편집자말] |
"나에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두루 알다시피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가 한 말입니다. 선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왜곡하면 누구에게나 끔찍한 낙인을 찍고 오류의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한 외신 보도와 유엔 특별보고관의 보고서, 국경없는기자회와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 등의 성명서를 보면, 정보가 극단적으로 왜곡되던 시절의 암울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외신기자들과 국제언론단체 등은 지금 한국의 대다수 언론을 통해 언론중재법 이슈를 파악할 텐데, 그들 보도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역사적 맥락과 언론의 보도태도를 감안해야 합니다
언론중재법은 역사적 맥락과 한국 언론의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여당이 이번에 언론중재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법이 생긴 유래부터 한국 언론의 특수상황을 말해줍니다.
징벌적 배상제는 갑작스레 만들어 언론 자유를 침해하려는 게 아니라 2004년 '쓰레기 만두 사건'을 계기로 억울한 피해자를 더 이상 양산해서는 안 되겠다며 법제화를 시도했던 제도입니다. '쓰레기 만두 사건'은 언론이 과장∙왜곡보도를 쏟아내 130개 업체가 도산 위기에 처하고 한 업체 사장이 투신자살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언론은 골뱅이 통조림에 시체 방부제인 포르말린을 넣었다는 '포르말린 통조림 사건'과 공업용 쇠기름으로 라면을 만들었다는 '공업용 우지 라면 사건' 등 숱한 보도참사를 저지른 전력이 있습니다. 허위∙과장보도로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도산 직전에 이를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수많은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는 손해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손해배상은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중재위원회의 탄생
그러나 2004년 당시에도 한국신문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한국PD연합회는 '징벌적 배상제가 언론자유를 침해한다'며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결국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으로 절충돼 오늘날의 언론중재위원회 체제로 확대개편됐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이 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으나 합헌 결정이 났습니다.
언론중재위원회는 그동안 언론 피해구제에 나름대로 역할을 해왔으나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합의와 중재에 매달리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배상액이 적고 소송으로 가는 과정을 지연시키는 등 역효과도 발생했습니다. 그동안 언론은 수많은 기업을 도산시켰습니다. 그중에는 배우 출신 황토팩 제조업자도 있었는데 도산 후 이혼하고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살자도 속출했지만 피해배상액은 제로이거나 변호사 비용도 안 되는 몇백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언론은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뇌물로 받은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선정적 보도를 쏟아내 끝내 자살로 몰아붙였습니다. 한국 언론의 허위∙과장보도는 인격 말살을 넘어 생명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언론중재법 개정안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인터넷 상의 '악플' 등으로 연예인을 비롯한 공인을 극한상황으로 몰아넣는 일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해 1월 4일 보도에서 한국의 배우와 K-팝 가수 등 30명이 자살했다며 '비난 게임(blame game)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언론 상황이 외신기자들과 유엔 특별보고관의 모국에서 벌어진다면 어떤 논조로 보도하고 보고서를 내시겠습니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나치협력자 중에서도 언론인을 포함한 지식인을 가장 가혹하게 처단했다는 사실을 알 겁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친일 행적이 역력한 언론사들이 최대 언론재벌로서 여론시장을 과점하고 있습니다.
언론 자유는 책임을 동반해야 합니다
미국 기자협회 국제커뮤니티 댄 큐비스케 공동의장은 <채널A> 인터뷰를 통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을 하는 건 처음"이라며 1964년 '<뉴욕타임스> 대 설리반 판결'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설리반 판결'은 언론 자유를 강조한 판결로 유명하지만, 진보성향 연방대법원 판사였던 펠릭스 프랑크푸르터는 이런 판결도 했군요.
"언론의 자유란 자유를 행사함에 따르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언론 자유를 수정헌법 1조에 천명한 '언론 자유의 천국'이면서 언론의 책임성도 매우 강조하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손해본 만큼 메워주는 실질적 전보(塡補) 배상과 징벌적 배상을 함께 시행하고 있죠. 미국처럼 한국도 지난해 상법 개정을 통해 징벌적 배상제를 도입하고 언론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단체들이 "언론에 제조물 책임을 묻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며 반대하는 통에 입법이 좌절됐습니다.
이번 특별법 개정안은 미국식 무한배상 정신까지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5배로 한도를 정해 과잉징벌을 막고 배상액 산정은 법원에 맡기겠다는 법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한국을 '독재국가'라 부른다면, 훨씬 가혹한 징벌적 배상이 허용되는 미국은 '최악의 독재국가'라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많은 외신보도와 달리 언론중재법은 언론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도록 제동장치를 두고 있습니다. 제5조에는 '언론 등의 보도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으로서 진실한 것이거나 진실하다고 믿는 데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언론이 책임을 지지 않도록 돼 있습니다. 열람차단청구권도 청구를 하면 바로 기사가 차단되는 게 아니라 언론중재위 조정을 거치게 되고, 언론사가 차단에 동의하지 않으면 소송으로 가게 돼 현행 조정 절차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유엔 인권사무소가 언론 피해자 인권은 무시합니까?
아이린 칸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한국 정부에 보내온 서한도 우리 언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 실망스럽습니다. 언론중재법은 한국도 가입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 19조 3항, 표현의 자유에 일정한 법적 제한을 허용하는 항목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조항은 '타인의 권리 또는 신용의 존중'이나 '국가안보나 공공질서 또는 공중보건이나 도덕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경우'로 한정하고 있는데, 언론중재법이 바로 그런 사안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또 '언론인들이 취재원을 누설하도록 강요받을 수 있어서 언론 자유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법원에서는 수명(受命)법관이나 수탁판사 제도를 운용하고 있어서 그 법관만 진술을 듣고 고의∙중과실 여부를 판단한 뒤 기밀을 봉인하면 얼마든지 취재원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칸 보고관에게 탄원서를 보낸 두 한국 법률가가 이 글과 지난번 글(
언론중재법, 개혁 대상이 주도하려는 개혁 성공할까) 등 여러 칼럼에서 적시한 한국 언론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전달했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법을 제정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은 사회현실의 반영이 아니겠습니까?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한국 언론의 자유도는 아시아에서 가장 높지만 신뢰도는 조사대상국 중 꼴찌 수준입니다.
과거 활동 경력으로 보아 자유지상주의 성향인 듯한 탄원인 중 한 명은 국회 언론중재법 관련 8인협의체에 '수구야당' 추천으로 참여했는데, 유엔 보고관이 균형된 정보에 근거해 보고서를 썼는지 의문입니다. 칸 보고관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홈페이지에 보고서를 공개했는데, 그것이 한국에서 엄청나게 유린되고 있는 언론 피해자의 인권을 고려했는지 답변하기 바랍니다.
'외신사대주의'가 외신 존중으로 바뀌길 기대합니다
한국은 역사적 변곡점에서 외신이나 국제언론단체와 유엔 인권이사회 등의 덕을 본 적이 많습니다. 외신기자들은 5.18광주민주화 투쟁도 국내 언론이 침묵하거나 왜곡할 때 유일하게 진실을 보도했고 국제언론단체들은 성명서 등을 통해 언론 자유 확대에 기여해왔습니다. 그러나 외신에 대한 믿음은 '외신사대주의' 같은 그릇된 외신 이용행태로 어긋나버린 측면도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미국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월스트리트저널> <블룸버그통신> 등이 한국 경제를 지나치게 후려치고 고금리정책과 기업매각을 종용한 것은 한국인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한국 재벌이 외환위기를 유발하고 미국 금융자본이 위기를 증폭시키는 데 분노해 영국에 유학 가서 학위 논문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한참 뒤 국제통화기금(IMF)도 자신의 정책 과오를 반성했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제프리 삭스, 로버트 웨이드 등에게 아낌없이 지면을 내주면서 국제통화기금의 가혹한 처방이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때는 그 신문이 경제저널리즘의 표준으로 여길 만큼 신뢰가 가더군요.
그러나 2005년 9월 한국이 외국 투기자본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애너 파이필드 한국 특파원은 '한국이 완전히 정신분열적 태도를 보인다'고 비난했습니다. 외환위기 때와 달리 한국에 진출한 영국 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유학 중 <한겨레>에 글을 보내 유착관계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국내 언론의 '외신사대주의'는 외신이나 국제인권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할 때마다 그것을 인용해 사설이나 칼럼의 논거로 삼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왜곡된 정보가 끝없이 환류되는 형국입니다. 언론중재법 통과를 한 달 미룬 데는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의 역할이 컸는데 그 또한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진실을 담지 못한 성명서에는 주권국가로서 당당하게 반박할 일이지 추종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외신기자와 국제언론단체 그리고 유엔 특별보고관은 언론중재법의 역사적 배경과 한국 언론의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법안의 내용을 비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 9. 17. 이봉수 드림
[관련 기사]
언론중재법, 개혁 대상이 주도하려는 개혁 성공할까 http://omn.kr/1v39t
대형 언론사에 절망하는 국민에게 회초리 하나는 필요합니다 http://omn.kr/1v0pk
징벌적 손배 반대하는 언론, 정말 '알 권리' 때문인가 http://omn.kr/1uu5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