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5월 3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이날 오후 2시 한강 백사장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와 부통령후보 장면의 정견발표 날이다. 오전부터 서울역에서 한강에 이르는 도로는 사람의 행렬로 가득했다. 그쪽으로 가는 전차와 버스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인파에 놀란 당국이 노량진행 전차의 운행을 중지시키고 뒤이어 버스와 택시도 중지시키자 시민들은 걸어서 한강 백사장으로 모여들었다. 정오가 지나면서 서울시내에는 행인이 사라지고 시장ㆍ백화점ㆍ극장 등도 한산해졌다.
5월 3일이었어요. 신익희의 연설을 들으려고 용산의 전차 정거장부터 마비가 되다시피 해서, 걸어가면서 한강 백사장으로 몰려들었어요.
지금 한강은 옛날 한강과 매우 다릅니다. 젊은 사람들은 서울도 옛날 모습을 잘 모르지요. 백사장이 굉장히 넓었습니다. 한강 인도교 북쪽 백사장만 꽉 찬 게 아니라, 강 너머 흑석동 쪽에도 꽉 찼어요.
거기서 신익희가 기염을 토한 겁니다. 20만 명이라고 보도한 신문도 있습니다만, 동아일보는 30만 명이라고 했어요. 그 당시 서울 유권자가 70만 명쯤 됐을 거예요. 유권자의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은 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석 3)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신익희도 당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구름 같이 모여든 30만 시민들을 보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강 인도교 아래 백사장 일대에는 대형 스피커 10대가 설치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청년 당원들이 경비하고 있었다.
몹시 상기된 표정으로 단상에 올랐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성이 한강 백사장을 진동시켰다. 마침내 생애 최대의 그리고 생애 마지막의 사자후가 터졌다.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된 신익희의 역사적인 연설 중 주요 대목을 뽑는다.
여러분! 이 한강 모래사장에 가득히 모여 주신 친애하는 서울시민! 동포! 동지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해방이 되기 전에 약 30년간이나 외국에 망명생활을 하던 사람의 하나로서 오랜 시간을 두고 본국 안에 살고 있는 부모 형제자매 동포 동지들이 그리워서 밤과 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짓던 사람입니다.
오늘 이와 같이 많은 우리 동포 동지들과 이 한자리에서 대하게 되니, 내 감격은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6ㆍ25 사변 때 우리 전국 남녀 동포 동지들의 가슴 속에 깊이 박힌 원한의 한강에서 이렇게 많이 만나 뵙게 되니 더욱 감개한 회포를 불금(不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40년 동안이나 두고 우리 전국 동포들 남녀 노유를 막론하고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어야 우리는 살겠다고 하였거니와, 참으로 우리는 오매지간(寤寐之間)에도 염원하고 축수하고 기다리던 나라의 독립, 국민의 자유를 제국주의를 응징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찾은 지도 벌써 8년입니다. 일본제국주의 파멸에 이은 무조건 항복이라는 것이 있은 지 9년이나 되는 것을 기억하지만,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도 8년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살림살이 살아가는 형편이 어떠한 모양이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 전국 동포 동지들이 날마다 시간마다 꼬박꼬박 우리들이 몸소 겪고 몸소 지내 내려 온 터인지라 여러분은 특별히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살아 가는 이 모양 이 꼬락서니, 우리들이 40년 동안을 두고 주야로 원하고 바라던 독립! 이것이 결코 우리가 사는 꼬락서니가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만사가 이유 없는 일이 없습니다. 무슨 이유? 무슨 까닭? 이 까닭은 말하자면, 책임 맡아 나라 일하는 이들이 일 잘못해서 이 꼬락서니가 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고래(古來)로부터 내려 오는 정경대원(正逕大原)의 원칙일 것입니다.
국토는 양단된 채로 우리들이 사는 형편, 언제까지든지 우리가 이 모양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고생에 파묻혀 있나?
여러분! 오직 우리나라 정치가 한 사람의 의사에 의한 1인 독재 정치로 여론을 다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함부로 비판이나 모든 가지의 체계 없는 생각이랑, 정책이랑 함부로 거듭해서 불법이니, 무법이니, 위법이니 하는 것이 헌법을 무시하는 것을 비롯하여 큰 법률, 작은 법률 지키지 않는 까닭에 우리들의 도덕은 여지없이 타락되어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없는 여차한 형편으로 한심한 형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석
3> 서중석, 앞의 책, 9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