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부모님 집에서 삼일을 자고 내가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하루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냐"고 했다. 바쁜 일이 있으면 네 계획대로 하라고 늘 말하던 엄마였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반응이 의외였다. 엄마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반대를 하고 보는 아빠도 이번만큼은 동의를 하듯 잠자코 있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짐을 챙겨서 나가기가 귀찮아진 나는 "그럼 내일 가지 뭐" 하고, 일어나서 밥상에 맥주와 멸치볶음, 식혜를 담아서 왔다. 엄마와 내 잔에는 맥주, 아빠한테는 식혜를 따랐다. 평소에는 엄마가 반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허락(?) 하지 않는 아빠지만 이번에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반면 엄마는 딸 덕분에 "너희 아빠 앞에서 술을 마신다"며 신이 나셨다.
부모님 집에서 공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텔레비전을 끄고 나는 휴대전화와 블루투스로 연주곡을 틀었다. 빗소리와 잔잔한 음악소리가 우리를 감쌌다.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우리 셋이 있어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빠가 옛날에 자주 불렀던 노래가 뭐였지? '피리 부는 사나이'?"
"인자는 목청이 약해져가 부르지도 못해."
방금도 버럭 소리를 지른 아빠가 갑자기 힘 빠진 소리로 말했다. 아빠 성대는 아직 내 것보다 쌩쌩한데요, 라는 말은 삼키고 이번에는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뭐야?"
"나는 있다. 지친 몸을 쉬어나 볼까, 카는 거 있다."
"그게 제목이야?"
"아니, 가사에 그른기 있어."
이때 아빠가 끼어들었다.
"너거 엄마는 제목이고, 가수고 하나도 모른다."
유튜브에 '지친 몸을 쉬어나 볼까'를 검색하자 '저 하늘에 별을 찾아'라는 가수 유지나의 곡이 나왔다. 내가 노래를 틀자 엄마가 박수를 치면서 "그래 이기다"라고 했다.
엄마는 휴대전화에 나오는 가사를 보면서 아빠한테 보란 듯이 열창을 했고 "하늘을 이불 삼아 밤이슬을 베개 삼아 지친 몸을 달래면서 잠이 드는 집시 인생"이란 대목에서는 스스로 감동해서 눈물까지 조금 흘렸다. 노래가 끝난 뒤에는 머쓱한지 "가사가 참 좋제, 그쟈?"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7시 30분에 아빠는 밥 안 주고 뭐하냐며 엄마를 채근했다. 부모님집에 있는동안 식사 준비는 내가 했지만 그날은 일찍 출발하려고 짐을 싸고 있었다. 아빠와 밥을 먹으며 엄마가 부엌에 간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침식사 준비는 아빠가 하면 어때요? 이렇게 드시는 건 할 수 있잖아요."
이번에 내가 제일 놀란 건 부모님이 아침식사로 샐러드를 드시는 거였다. 탄수화물보다 단백질과 야채가 몸에 좋다는 말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거다. 한평생 국이 없으면 식사를 못하는 아빠였기 때문에 이 변화가 나한테는 혁명처럼 느껴졌다. 우리 아빠가 변하다니.
소스는 마트에서 파는 대용량 제품을 사서 먹는데 이번 건 맛이 없다는 아빠의 말에 나는 재빨리 오리엔탈 소스를 만들었다. 올리브 오일 대신 부모님 입맛에 맛게 참기름에 간장, 마늘, 꿀을 섞었는데 아빠가 맛있게 드셔서 내가 많이 만들어놓고 가겠다고 하자 아빠는 이미 산 소스를 다 먹어야 한다며 거절했다.
아무튼 삶은 계란, 두부구이, 각종 채소를 큰 접시에 담기만 하는 건 아빠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잔소리라도 하지 않으면 모르지만 이건 너무 많이 삶았다, 왜 이렇게 많이 담았냐, 하며 못마땅해하니 아빠가 직접 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가 급발진을 하지 않게 하려면 나는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태도를 가장해야 했다.
"앞으로 아빠한테도 필요할지도 모르고, 조금씩 해보시면 아빠도 편해지실 거예요."
이번에도 아빠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버럭 하지만 아빠는 분명히 변했다. 끝까지 자기 말이 맞다고 고집을 피우는(건 여전하지만) 횟수가 줄었고 침묵으로 긍정을 표현했다. 엄마를 들들 볶는 아빠를 보면 화가 나지만 비난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난을 할수록 아빠는 마음의 빗장을 단단하게 닫아걸 뿐이다. 그렇다고 부모님 일이라며 방관하고 싶지도 않다. 엄마, 아빠에게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빗소리와 잔잔한 음악소리가 채운 그 순간처럼 보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빠는 분양받은 31층 아파트에 이사 가지 않고 군산에서 나와 살겠다고 했다. 새 아파트에 가서 1년만 살겠다는 아빠에게 "아빠의 1년은 우리와 다르잖아요"라고 한 말이 아빠의 가슴에 남았을까. 우리 아빠도 변하는구나, 나는 군산에 언제든지 와서 살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의 평화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빠처럼 자존심 센 사람이 이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무척 놀랐다. 아빠가 몸보다 마음이 약해졌구나. 아빠가 한평생 일했던 공장의 쇠뭉치처럼 강했던 아빠가 이렇게 달라지는 게 낯설었다.
내내 말할 기회를 계속 엿보다가 아빠한테 상담 얘기를 꺼냈다(이제는 나의 평화가 달려있기에 미룰 수 없다). 예상한 대로 아빠는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런 걸 받냐며 펄쩍 뛰었다. 평생 드시던 국도 건강을 위해 안 먹을 수 있다면 삶의 질을 위해 태도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저 뭐라도 시도해보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