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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 곳에 광명이 있나니
젊은 그대여 나아가자!
오직 앞으로 앞으로 또 앞으로
가시덤불을 뚫고

비록 모든 사람이 주저할지라도
젊은 그대여 나아가자!
용기는 젊은이만의 자랑스런 보배
어찌 욕되게 뒤로 숨어들랴

진실로 나아가는 곳에 광명이 있나니
비록 나아가다가 거꾸러질지라도
명예로운 그대, 젊은 선구자여
물러섬 없이 오직 나아가자!
 
이는 박팔양 시인이 《중앙》(1936년 2월호)에 발표한 '선구자'라는 시다. 박팔양 시인은 190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이때 정지용 시인 등과 <요람>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18살 되던 해인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신의 주(神의 酒)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박팔양 시인의 필명은 김려수(金麗水)인데 여기서 여수(麗水, 如水)는 호다. 그의 대표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1940)는 말하자면 박팔양 시인의 호를 딴 시집인 셈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출간한 박팔양 시인의 <여수시초> 표지, 일본의 중견 시인 우에노 미야코 번역
일본 오사카에서 출간한 박팔양 시인의 <여수시초> 표지, 일본의 중견 시인 우에노 미야코 번역 ⓒ 책표지
 
박팔양 시인의 《여수시초(麗水詩抄》가 일본의 중견 시인 우에노 미야코(上野 都, 74)씨에 의해 지난 8월 15일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윤동주 시인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일본 도쿄. 2015) 을 일본어로 완역하여 출간, 일본에서 큰 호평을 받은바 있다. 우에노 시인은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일본 시단의 원로 시인이다.

이번에 일본어로 번역한 박팔양의 《여수시초(麗水詩抄》에는 모두 62편의 시가 자연·생명, 도회, 사색, 애상(哀想), 청춘· 사랑 등의 섹션으로 나눠 수록되어 있으며 부록에는 선집된 작품이 게재된 시집, 잡지, 신문 등에 대한 정보도 친절하게 소개해 놓았다.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어떤 계기로 박팔양 시인의 《여수시초(麗水詩抄》를 출간하게 되었는지 등이 궁금하여 다음과 같이 서면 대담을 했다. 다음은 대담 내용이다.

"그의 시에 묘사된 '일본 근대사'가 궁금했다"
 
 일본 시단의 중견, 우에노 미야코 시인
일본 시단의 중견, 우에노 미야코 시인 ⓒ 이윤옥

- 박팔양 시인의 시집 번역을 하게 된 계기를 알려 주십시오.

"박팔양 시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지만, 그의 시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 가운데 한 구절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고'를 늘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재일 한국인으로부터 박팔양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박팔양 시인을 소개하는 일이라 흔쾌히 응했습니다. 특히 박팔양 시인이 살던 시대가 일제강점기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 혹시 그려져 있을 '일본의 근대사'가 어떻게 묘사되었나 하는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 이번에 일본 한마음 출판사에서 번역 소개한 월북작가는 박팔양 외에 다른 작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번에 일본어 번역은 오로지 박팔양 시인 한사람뿐입니다."

- 박팔양 시인의 시를 번역하면서 특징이라거나 경향 같은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해주십시오.

"《여수시초》에는 주로 젊은 박팔양 시인의 서정성이 느껴집니다만 그 밑바닥에는 왠지 모를 식민지하의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억압당한 비탄'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한 검열을 받으면서도 써야한다는 억눌린 심정이 느껴질 만큼 시대를 고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박팔양 시인의 시를 번역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지요?

"박팔양 시인의 표면적인 영탄(詠嘆) 속에 녹아들어 있는 시대적인 고뇌를 잘 살려내는 작업이 어려웠습니다. 《여수시초》는 19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여기에 실린 시어(詩語) 들을 일본인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되 그 본래 의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 우에노 미야코 시인께서는 이미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일본어로 완역하여 큰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의 근대 시인에 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요즘 일본에서 'K문학(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소설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 안타깝게도 한국의 근대시인 시집은 윤동주 시인 외에 새로 번역본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에서 1954년부터 2010년까지 나온 《조선시집》 속에는 김소운(金素雲), 김수영(金洙暎), 박노해(朴ノヘ), 고은(高銀), 김소월(金素月), 이상화(李相和), 이육사(李陸史), 정지용(鄭芝溶), 한용운(韓雲龍), 이상(李箱), 김기림(金起林)등의 시가 앤솔로지(Anthology, 선집) 또는 평론 형식으로 소개된 바는 있지요. 이분들에 대한 관심은 역시 전문 분야의 연구자나 일부 애호가 일 것입니다. 그에 견주면 이번에 출간한 박팔양 시집 《여수시초》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지요."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기자의 질문에 능숙한 한국어로 답을 보내왔다. 박팔양 시인! 우리에게도 생소한 이름의 시집 《여수시초》를 일본 독자를 위해 일본어 번역판이 나온 마당에, 한국인으로 이 시집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같아 기자는 한글판 《박팔양 시선집》(현대문학, 유성호 엮음, 2009)을 사서 읽었다.

엮은이 유성호 교수(2009년 당시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는 "박팔양은 다른 시인이나 작가들 보다 화려한 조명을 못 받은 편에 속한다.(가운데 줄임) 분단체제가 낳은 이념적 금기가 우리의 괜찮은 문학사적 자산을 몰각 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문학사의 정당한 역사 유산을 실증적으로 되살려 문학사를 재구성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끝 줄임)"라고 했다.

여기서 "분단 체제가 낳은 이념적 금기"란 박팔양의 월북을 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박팔양은 단순한 월북작가들과는 조금 다른 이력의 작가다. 1937년 만주에서 <만선일보(滿鮮日報)> 기자로 활동했던 전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선일보>가 어떤 신문인가?
 
"만주에서 1937년에 창간한 친일신문, 만주에는 일찍부터 150만 내지 200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어 일제는 정책적으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이 신문을 통해 언론통제 정책을 단행하고, 정치구호로 내세운 만선일여(滿鮮一如)를 달성하고, 5족(五族 : 조선족·중국한족·만주족·몽고족·일본족) 협화(協和)의 도모를 꾀하고자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제가 접수한 만주국의 앞잡이 신문 <만선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박팔양은 1945년 광복 후, 북한에 남아 <로동신문> 주필 등을 맡는 등 '해방후 행적이 간단치 않은 무게를 지닌 인물'임은 틀림없다. 그런 이력 때문에 남한에서는 그의 이름 석 자가 '금기시' 되어 왔는지 모른다.

유성호 교수는 《박팔양 시선집》에서 박팔양 시인을 가리켜 "박팔양은 우리 근대시사의 다양한 정신적 단면을 두루 자신의 화폭으로 담아낸 개성 있는 시인이었다. 그의 시적 기조는 한결같이 현실성과 서정성 사이의 갈등과 통합에 있었다. "라고 했다.

《여수시초》를 일본어로 번역한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내가 사는 일본에는 한반도의 분단처럼 커다란 단체가 두 개 있습니다. 나는 양쪽(북한, 남한)에 속하는 사람들과 교우 관계가 있지만 정치적인 분야를 빼놓고는 선입감 없이 친하게 지냅니다. 박팔양의 시를 《여수시초》(1940)에 한정한 것은 해방 후 그가 북한 생활에서 쓴 정치색있는 시를 번역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점에서는 박팔양처럼 월북시인에게 위화감이 없습니다. 《여수시초》를 통해 일본이 1900년대에 조선(한국)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다시 되짚어보았습니다. 한국의 남북 분단은 일본인으로서 져야할 평생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대담을 마쳤다.
 
우에노 미야코 시인은 누구인가?
1947 일본 도쿄 출생
1970년 후쿠오카현립 기타큐슈대학 영미(英美)학과 졸업
1973년 후쿠오카 시잡지 '아루메' 동인
1974년 재일한국문인협회 정회원
1992~1994 오사카시 히라타타시교육위원회 조선어교실에서 한국어 수학
2021년 현재 일본현대시인협회 회원
 
대표시집으로는 《훼어리 링스, 1968》, 《여기에, 1998》, 《바다를 잇는 밀물, 2002》, 《지구를 도는 것, 2013》 등이 있으며 번역시집으론 김리박 시인의 《견직비가, 1996》, 《삼도의 비가, 2013》 , 《空と風と星と詩(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등 다수
 
《여수시초(麗水詩抄)》, 박팔양 지음, 우에노 미야코 번역, 일본 한마음출판사, (2021.8.)
 

 

덧붙이는 글 | 우리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박팔양#여수시초#우에노 미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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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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