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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9일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당선된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이 도쿄 자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선거에서 자민당 제27대 총재로 선출된 기시다는 다음 달 4일 소집되는 임시국회에서 스가 요시히데 총리에 이어 제100대 일본 총리로 선출된다.
지난 29일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당선된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이 도쿄 자민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선거에서 자민당 제27대 총재로 선출된 기시다는 다음 달 4일 소집되는 임시국회에서 스가 요시히데 총리에 이어 제100대 일본 총리로 선출된다. ⓒ 연합뉴스=신화
 
29일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 총재 선거에 승리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중의원 의원은 중대 변수만 생기지 않는다면 오는 10월 4일 임시국회에서 제100대 총리로 선출된다.

1885년 12월 22일, 훗날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는 만 44세의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계산하면, 기시다 후미오는 제100대 총리이자 64번째 총리가 된다. 136년간 64명이 배출됐으니 대략 2년마다 총리가 교체된 셈이다.

내각 전복을 시도했었던 기시다

1957년 7월 29일 출생한 기시다는 와세다 대학 법대생을 거쳐 1982년 일본장기신용은행 직원이 됐다. 30세 때인 1987년 아버지인 기시다 후미타케(岸田文武) 중의원 의원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9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고향 겸 지역구인 히로시마에서 1993년부터 총 아홉 차례 당선됐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때는 문부성차관이 됐고, 제1기 아베 신조 내각 때인 2007년에는 내각특명담당대신이 됐다. 2012년 출범한 제2기 아베 내각 때는 외무대신과 방위대신을 지냈다. 외무대신은 2012년 12월 26일부터 2017년 8월 3일까지 4년 8개월간 역임했다.

아베 내각의 대외정책을 관장했긴 했지만, 아베와 코드가 똑같진 않았다. 극우 성향을 보이는 아베와 달리, 그는 일반 보수인 '보수본류'로 평가된다. 가키자키 메이지(柿崎明二) <교도통신> 논설위원은 인터넷 매체 <닛폰닷컴>에 2019년 1월 8일 기고한 '포스트 아베는 누구? 자민당의 수상 후보들(ポスト安倍は誰?自民党の首相候補たち)'에서 기시다를 가리켜 "보수본류인 고치카이(宏池會)의 적통을 자부"한다며 "아베 수상과는 이념·정책적으로 정반대"라고 평가했다.

극우파는 미일동맹을 활용해 대외적 군사 팽창을 도모하자고 주장하는 데 비해, 보수본류는 미일동맹을 활용해 군사활동의 비중을 낮추고 경제성장에 주력하길 바란다. 2000년 4월 5일 해체된 오부치 게이조 내각 때까지는 보수본류가 자민당의 주류였고, 그 이후의 모리 요시로 내각부터는 극우파가 주류다.

"이념·정책적으로 정반대"인데도 기시다는 총리의 평균 임기를 2배 넘는 4년 8개월 동안 아베 내각에서 외교정책을 관장했다. 자신과 반대 성향인 인물에게 장기간 동안 외교를 맡긴 사실로부터, 아베가 그의 실무능력을 인정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동시에 기시다가 자기 생각을 많이 억눌렀을 것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고 기시다가 '성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0년 11월 20일에는 당시의 고치카이 회장인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1939~2016) 중의원 의원과 함께 '가토의 난'을 일으켜 모리 내각의 전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야당이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할 움직임을 보이자 43세의 기시다가 가토 고이치 같은 보수본류에 가담해 내각 전복을 기도했던 것.

실패로 끝난 이 사건은, 기시다라는 인물에게 기회만 주어지면 자기 색깔을 드러내려 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베 내각 하에서는 그런 기회가 생기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극우파가 자민당을 주도하고 있으므로 기시다가 '난'을 일으키는 데는 제약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일본 당황케 한 박근혜식 외교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왼쪽부터)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해 군사퍼레이드를 관함하고 있다.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왼쪽부터)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해 군사퍼레이드를 관함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베 내각 하에서 자기 색깔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과 더불어, 기시다와 관련해 한국에서 많이 언급되는 것이 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의 주역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피해자의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과 더불어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게 금전을 직접 지급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설립한 재단을 통해 간접 지급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 금전 지급 명목을 '피해 배상'이 아니라 '지원'으로 했다는 점 등 때문에 호된 비판을 받은 합의의 주역이다.

그런데 한국과 관련된 그의 역할 중에 제대로 주목되지 않은 대목이 있다. 외무대신으로 재직한 2012년 12월 26일부터 2017년 8월 3일까지 그가 한국에 미친 영향이 충분히 조명되지 않고 있다.

그의 외무대신 재직 기간은 박근혜씨의 대통령 임기와 어느 정도 겹친다. 이 시기 박근혜 정부는 미국과 일본을 다소 당황케 만드는 외교적 행보를 선보였다.

우선,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역사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는 2013년 2월 25일 일본 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취임식 축하차 방문한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대신에게 "양국 간에 아직도 역사문제 등 현안들이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한일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의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심'을 보여 달라고 촉구한 것이다. 또 나흘 뒤 3.1절 기념사에서도 박근혜는 일본의 반성을 재차 촉구했다. 

이후 한일관계상 긴장감이 조성된 데 비해, 한중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됐다. 박근혜는 취임사에서 "앞으로 아시아에서 긴장과 갈등을 완화하고 평화와 협력이 더욱 확산될 수 있도록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및 아시아·대양주 국가 등 역내 국가들과 더욱 돈독히 신뢰를 쌓을 것"이라는 발언이 있었다. 미국 중심에서 벗어나 다자주의 외교에 나설 것임이 예고된 것이다.

2015년 9월 3일에는 중국 전승절의 인민해방군 열병식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등장하는 파격적인 사건까지 있었다. 이 일을 앞두고 그해 8월 31일자 <산케이신문> 칼럼은 박근혜를 '암살당한 민비'에 빗대기도 했다.

2008년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치르고 미국이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낳은 데 이어 2010년에 중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추월하자,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2011년에 '중국과 협력하되 중국을 견제하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내놨다. 중국과의 협력을 표방하던 종전의 정책 기조에 수정을 가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중국과는 유대를 강화하고 일본과는 마찰을 빚었다. 이는 한미일 삼각체제로 북한·중국을 견제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기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이나 일본이 볼 때는 다소 소극적 양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박근혜의 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기시다 후미오가 외무대신으로 재임한 기간은 이처럼 미일 양국이 박근혜 정부의 대(對)중국 노선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미국의 개입 시작... 그 결과물이 바로 '위안부 합의'
 
위안부 문제 논의, 한-일 장관회담 2015년 12월 29일,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대신이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한 회담을 시작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 논의, 한-일 장관회담2015년 12월 29일,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대신이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한 회담을 시작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그런데 이 같은 긴장 상태는 전승절 참관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적극 개입함에 따라 진정 단계로 접어들었다. 2016년에 <일본연구논총> 제44호에 실린 신정화 동서대 교수의 논문 '동북아 안보구도와 한일관계: 아베 내각을 중심으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확대일로에 있었던 한일 갈등은 2015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전에서의 참석을 계기로 봉합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의 '대중(對中) 경사(傾斜)'를 견제하면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하고, 안전보장에서의 한국의 최대 파트너는 미국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중 밀착을 견제하고 한일 불화를 중재하는 속에서 기시다 후미오가 했던 일이 바로 위안부 합의 체결이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봉합하는 데 그친 이 사건은 박근혜 정부와 아베 내각이 더 이상 마찰을 빚지 않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뒤이어 2016년 1월 6일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이라고 주장하는 제4차 북한 핵실험이 단행되고, 이를 계기로 대북 견제 심리가 증폭되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은 종전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서 대북 고강도 압박 정책을 폈다.

이런 정세 변화는 한미일을 다시 밀착시키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해 7월 8일에는 한중관계에 악영향을 줄 '사드의 한국 배치'가 공식 발표됐다. 이어 11월 22일에는 한일관계를 강화시켜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이 체결됐다. 전승절 참관 사건으로 긴장감이 증폭됐던 한미일 관계가 그로부터 1년여 동안에 되레 단단해졌다. 미국·일본이 볼 때 '박근혜의 난'은 무위로 끝났다.

박근혜 정부의 대(對)중국 외교정책이 유야무야되고 한미일 삼각관계가 다시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기시다 후미오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주도한 위안부 합의는 이 관계를 재봉합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역할은 무엇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희망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한일관계의 위기 국면에서 총리대신에 오른다. 앞으로 그가 한일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주목된다.

#기시다_후미오#일본_총리#한일_위안부_합의#보수_본류#일본_자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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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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