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이 국권을 강탈당한 해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탄생한 이 해에, 한국 도서관계의 '별'이 되는 인물이 여럿 태어났다. 대한민국 초대 농지국장 강진국(姜辰國),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李在郁),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朴奉石), 대한민국 사서 1호 이규동(李揆東)이 모두 1905년 을사년 생이다.
같은 해 태어난 네 명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모두 영남에서 태어나거나 활동했다는 점이다. 강진국은 경남 동래, 이재욱은 경북 대구, 박봉석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이규동은, 생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다.
1900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난 손진태(孫晋泰 보성전문학교 초대 도서관장), 1921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난 엄대섭(嚴大燮 마을문고 운동의 선구자)까지 떠올리면, 영남은 한국 도서관의 '태산북두'를 배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서관 선구자'라는 점에서 강진국, 이재욱, 박봉석, 엄대섭은 같지만, 그 면모는 조금씩 다르다. 이재욱이 '학자', 박봉석이 '행정가', 엄대섭이 '운동가'의 면모가 강하다면, 강진국은 '도서관 사상가'에 가깝다.
일본인과 나란히 조선 도서관계를 이끈 사람
을사년 동래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 강진국의 유년 시절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법률가를 꿈꾼 그는, 일본 니혼대(日本大)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법학을 전공한 강진국은, 법률가의 길을 걷지 않고 농촌 문제 해결에 뜻을 두었다. 일본 유학 당시 농촌갱생과 협동조합 운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931년 10월 25일 <조선일보>는 월간 문예잡지 <신흥문단>(新興文壇) 창간 준비 소식을 보도했다. 니혼대 출신 강진국도 창간을 함께 준비했다. <신흥문단> 임시사무소는 적선동 16번지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가, 1931년 무렵 귀국했음을 알 수 있다. <신흥문단>이 '프롤레타리아 문예잡지'를 표방했다는 기사를 통해, 당시 강진국의 사상적 지향을 알 수 있다.
조선으로 돌아온 강진국은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에서 일했다. 1931년 9월 조선도서관연구회에서 발간한 <조선지도서관>(朝鮮之圖書館) 창간호 회원명단에 강진국의 이름이 있다. 경성부립도서관 시절, 그는 눈에 띄는 두 가지 '발자취'를 남겼다. 하나는 '조선도서관연구회' 이사를 맡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문고'(農村文庫)에 대한 글을 써서 발표한 점이다.
'조선도서관연구회'는 1926년 3월, 식민지 조선 전체를 아우르는 도서관 단체로는 처음 발족했다. 도서관 단체의 명맥은 '조선도서관연맹'(1939년)을 거쳐, '조선도서관협회'(1945년), '한국도서관협회'(1955년)로 이어진다.
강진국은 조선도서관연구회에서 단둘뿐인 조선인 임원이었다. 강진국과 성달영(成達永)은 일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제강점기 조선 도서관계를 이끌었다.
강진국은 1936년 2월 27일부터 3월 11일까지 <동아일보>에 <농촌문고 창설의 급무>를 기고했다. 1년 반 뒤인 1937년 10월 8일부터 그는, 같은 신문에 <농촌문고 경영론 - 그 필요와 방법에 대하여>라는 글을 24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가 '도서관 사상가'인 이유
강진국이 꿈꾼 '농촌문고'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강진국은 '농촌문고', 즉 도서관을 농사와 생활, 교육과 의료의 인프라로 삼자고 주장했다. 농촌문고를 도서관뿐 아니라 협동조합, 학교, 병원, 나아가 농촌공동체의 중심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동시에 그는 농촌문고 보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강진국은 조선총독부의 농촌.교육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강진국이 주장한 '도서관 중심주의'는, 이 땅에서 주창한 도서관 사상 중 가장 '혁명적'이다. 농촌문고를 통해 개벽을 꿈꿨기 때문이다. 1930년대 동아시아 도서관 담론에서 강진국은,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였을 것이다. 강진국이 꿈꾼 농촌문고는, 훗날 엄대섭의 '마을문고 운동'을 통해 이 땅에서 꽃을 피웠다.
연재 말미에 강진국은 '농촌문고에 대해 문의할 사항이 있으면,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에 있는 필자에게 연락하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농촌문고에 대한 글을 연재하던 1937년 무렵, 강진국이 종로분관에서 일했음을 알 수 있다. 농촌문고 사상을 정립하고 펼치는 과정에서 강진국은, 대동콘체른을 세운 '광산왕' 이종만(李鍾萬)과 만났다. 강진국과 이종만의 인연은 해방 후 '중간파' 활동으로 이어진다.
강진국은 언제까지 도서관에 몸담았을까? 1939년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강진국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진국은 1939년 4월 4일 오후 6시, '라디오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도서관 이야기'를 방송했다. 이즈음까지 강진국이 도서관에 근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강진국이 '농촌문고'에 대해 <동아일보>에 발표한 글은 '도서관 사상가'로서 그의 면모를 되새겼지만, 조선총독부 눈 밖에 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의 글을 문제 삼았다. 이재욱의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추천사를 쓴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조선총독부도서관장은, 강진국과 그의 글을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강진국의 주장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의 근간을 뒤흔드는 불온한 사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가 임원으로 활동한, 조선도서관연구회 기관지 <조선지도서관>이 1938년 유야무야 폐간된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이끌던 조선도서관연구회 역시, 조선총독부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이 주도하는 조선도서관연맹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35년부터 <문헌보국>(文獻報國)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다. 간행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총독부도서관과 <문헌보국>은 '국가주의'에 복무하는 도서관을 지향했다.
농촌문고에 대한 강진국의 글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가토 가즈오(加藤一夫)를 비롯한 여러 일본인 학자가 쓴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일본 도서관학자가 쓴 이 책은, 한국에서 잊힌 강진국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다. 일제에 의해 도서관을 떠난 강진국을 조명한 이가, 한국이 아닌 일본 도서관계인 것이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지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은 아닐까.
해방 전후 강진국의 행보
총독부 눈 밖에 나자, 이를 피해 강진국은 1946년까지 삼척탄광에 머물렀다. 삼척탄광에 머물던 강진국은 1946년부터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1946년 7월 23일 창립한 '조선산업건설협의회'(산건협)에 참여했다. 산건협은 '민족의 희생과 협조를 통해 조선 산업을 빠르게 재건하고 통일정권을 수립하자'라는 강령을 내걸었다. 산건협은 미군정의 적산 처리 정책을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산업 재건 운동을 펼쳤다.
1947년 9월 19일 강진국은 '조선산업재건협회'(재건협)에 참여했다. 입법의원 산업노농위원회에 설치된 재건협에서 그는, 경제 재건을 위한 정책 마련에 몰두했다. 재건협 회장은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 박건웅(朴建雄)이었고, 강진국은 실무 책임자를 맡았다.
1948년 2월 강진국과 재건협은 <조선산업경제의 실태와 재건책>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UN조선위원단에 제출했다. 이 책자를 통해 재건협은 조선 산업 재건을 위해, 남북 통일정부 수립이 시급함을 주장했다. 강진국과 재건협이 애써 만든 이 정책은, 입법회의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고 사장되었다.
분단이 가시화하고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 강진국은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민족자주연맹'에 관여했고, 분단 반대와 남북 협상을 촉구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참여했다.
훗날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는 좌익과 중간파, 제3세력의 동향을 정리해서 <사찰요람>으로 발간했다. <사찰요람>에 의하면, 강진국은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이었다. 당시 경찰국 사찰과는 강진국에 대해 "재경. 조봉암의 핵심"이라고 기록했다.
1948년 4월 30일, 강진국은 산업경제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소는 경제 재건에 필요한 과제를 다각도로 연구했다. 같은 해 5월 14일 북한이 단전(斷電) 조치를 취하자, 강진국은 전력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언론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1948년 6월 24일 결성된 조선언론협회에서 강진국은 상무이사 겸 사업부장을 맡았다. 조선인 최초로 근대 도서관에서 일한 서재필과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재직한 강진국은, 조선언론협회에 함께 몸을 담았다. YMCA에서 발족한 조선언론협회는, 서재필과 안재홍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1948년 9월 12일 송재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강진국은 서재필을 송별하는 자리에, 백범 김구, 서울시장 김형민과 함께 참석했다. 그렇게 조국을 떠난 조선인 최초의 사서, 서재필은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1년 세상을 떠난 송재의 유해는, 1994년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조봉암이 강진국을 발탁한 이유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조선산업재건협회, 산업경제연구소 활동을 통해 강진국은, 해방 조국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훗날 '중간파'로 평가받는 사상가.정책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중간파의 노선과 사상을 연구한 방기중 교수는, 강진국에 대해 이런 평을 한 바 있다.
"중간파를 대표하는 정치적 명망가나 저명한 학자는 아니지만 그는 중간파 진영의 경제건설 이념과 방안을 구체화하여 제시한 정책입안 실무자의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1948년 강진국은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에 의해 초대 농지국장으로 발탁되며, 신생 대한민국 최대 현안인 '토지개혁' 문제의 일선에 선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그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 이유는 뭘까? 훗날 강진국은 그 사연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48년 8월 봉선사에서 조장관(조봉암 장관) 주재 아래 농사심의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농업관계 학자·전문가 10여 명이 자유토론을 했는데 당시 나는 농지개혁과 농협조직을 강력히 주장했지요. 그런지 며칠 후 조 장관이 이영근 비서를 보내 농지국장을 맡아달라고 해요. 나는 단정 반대 입장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는데 박건웅 씨가 열심히 권해 취임을 승낙한 것입니다."
조봉암은 강진국의 어떤 면모를 보고 발탁했을까? <조봉암 평전>을 쓴 이원규는 강진국을 이렇게 평했다.
"농지국장을 맡은 강진국은 놀라운 추진력을 가진 데다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신념처럼 가진 사람이었다."
죽산 조봉암은 1925년 4월 17일 조선총독부도서관 근처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을 출범시킨 바 있다. 조봉암은 자신이 꿈꿔온 '평등 세상'에 대한 구상을, 해방 조국에서 강진국과 함께 펼치고자 했다.
조봉암은 농림부 차관에 강정택을, 농지국장에 강진국을 발탁하고, 실무를 담당하는 세 과장은 지정과장 윤택중, 분배과장 배기철, 사정과장 안창수로 구성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조봉암이 구성한 농지개혁팀을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정부 내의 최초의 토지개혁팀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중략) 토지개혁을 담당할 농림부의 정책결정자와 실무진은 당시 남한체제가 포용할 수 있었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가장 급진적인 인물들로 구성된 셈이었다. 강진국에 따르면 한민당계 의원들은 자기를 포함하여 농림부의 토지개혁 담당자들을 두고 공공연하게 '빨갱이', '공산당 앞잡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들에게는 개혁조차 혁명으로 보였던 것이다."
1948년 10월 1일, 강진국은 초대 농지국장으로 발령받고 업무에 착수했다. 강진국이 맡은 농림부 농지국은 토지개혁의 담당 부서였다. 농지국 부서 이름은 원래 '토지개혁국'이었다. 미군정 시절 쓰던 'Land Reform'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을 '농지국'으로 바꾼 사람이 강진국이다.
- 2편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했으나 모두가 잊은 이름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