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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매년 현충일이면 찾아가는 국립대전현충원 묘소가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창룡의 묘다. 파묘 시위를 하기 위해서다. 몇 해 전부터 묘소가 한 곳 더 늘었다. 파묘 시위가 끝나면 국립묘지법을 꼭 개정하겠다고 다짐하기 위해 들리는 곳인데 다름 아닌 고 조문기(1927~2008) 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묘다. 

그는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강관 주식회사에서 조선인 노동자 2000여 명을 모아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국내로 돌아와 대한애국청년단을 결성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특히 1945년에는 아시아 각국의 거물급 친일파들이 모여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친일부역자인 박춘금 일당의 주도로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열렸는데, 조 이사장을 비롯한 청년들이 미리 설치해 둔 폭탄을 터뜨렸다. '부민관 폭파 의거'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서울 한복판에서 이같은 의거가 일어나 친일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표석 앞에 선 조문기 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모습.
부민관 폭파 의거 기념표석 앞에 선 조문기 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의 모습. ⓒ
 

폭탄이 터지면서 대회장은 엉망이 되었고 일본 경찰은 눈에 불을 켜고 수색했지만 폭탄을 터트린 이들을 잡지 못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비밀에 부쳐졌다가 1945년 11월 13일 <자유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사건이 발발한 당시에는 민심 동요를 우려한 일제의 보도 통제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조 이사장은 생전 "변변히 한 일도 없이 독립운동을 팔아먹고 싶지 않다"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의거 당사자임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해방 뒤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던 조 이사장은 '이승만 암살 조작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1982년에야 사위가 몰래 독립운동 유공자 신청을 하는 바람에 유공자에 선정됐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1999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통일 운동 등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랍시고 끼어 있는 그 자리에 나란히 설 수 없었다"며 독립운동 사실을 말하기 꺼리던 그는 2008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숨지기 직전까지 국립묘지에서 친일파를 파묘하는 국립묘지법 개정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여전히 후대의 일로 남아 있다.

고려대생들이 '총장님 힘내세요' 현수막 든 이유

김준엽(1920~2011)은 1944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동양사학과를 다니다 강제 징집돼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일본군으로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에 배치됐지만 탈영했고, 같은 조선인 출신 학병 장준하와 합류하여 수천 리를 걸어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목숨을 건 장정이었다.

이후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는 등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 장준하 등과 더불어 미국 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1945년, 미국 전략첩보대(OSS)에서 제1기로 훈련을 받던 시절의 김준엽(가운데). 오른쪽이 장준하, 왼쪽이 노능서이다.
1945년, 미국 전략첩보대(OSS)에서 제1기로 훈련을 받던 시절의 김준엽(가운데). 오른쪽이 장준하, 왼쪽이 노능서이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김준엽은 해방 후인 1949년 귀국,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57년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웠고 내부에 통일을 위한 공산권 연구실을 설치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 연구기관이었다. 그는 한때 광복군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1982년 고려대 총장이 됐으나 전두환 정권과 맞서다 1985년 강제로 사임했다. 당시 전국의 다른 학교에서는 "어용 교수, 어용 총장 물러가라"는 데모가 끊이지 않았지만, 고려대 학생들은 정반대로 "총장님 힘내세요"라는 현수막을 들고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벌였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회고록 <장정>을 집필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장정>은 일본 징집병 탈출 및 광복군 시절, 고려대 총장 시절과 총장 퇴임 이후 등을 다루고 있다.

2011년 6월 그는 폐암 투병 중 사망했다. 생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된 데 이어 타계 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397호에 안장돼 있다. 부인인 민영주 애국지사는 10년 후인 2021년에 타계,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됐다.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길고 흰 수염, 백발, 두루마기, 고무신… 함석헌(1901~1989) 선생 하면 떠올리게 되는 외모다. 그는 1901년 3월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보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하숙방에서 목판으로 태극기를 새겨 찍어내고 경찰서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렸다가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1942~43년 고향인 용천에서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의 사상의 폭은 깊고 넓었다. 기독교 사상에서 머물지 않고 불교 공부를 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로부터 보편적 휴머니즘, H. G. 웰스로부터 역사적 낙관주의, 간디의 비폭력평화주의를 이어받았다. 또 노자와 장자를 강의할 만큼 동양철학에 해박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사상계의 글로 옥살이를 했는데 이는 자유당 정권의 대표적인 필화사건이었다. '한국 기독교 무엇을 하고 있는가'(교회 비판), '5.16을 어떻게 볼까' 등의 글로도 필화사건을 겪었다, 또 군정 반대, 월남파병 반대, 한일굴욕외교 반대, 삼선개헌 반대 운동 등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그는 1984년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6월 항쟁 때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때문에 '싸우는 평화주의자', '한국의 간디', '야인', '지사', '민권운동가', '자유주의자', '행동하는 지성' 등 많은 애칭이 붙었다.  
 
 생전의 함석헌 선생 연설모습
생전의 함석헌 선생 연설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그를 상징하는 또 다른 특징은 '씨알의 소리'다. 1970년 4월부터 잡지 <씨알의 소리>를 통해 "민중아 깨어나라"고 외쳤다. 그가 '씨알의 소리' 복간호에 쓴 권두언은 마지막 유고가 됐다.

"저들은 씨알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지만,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이면 다시 살아나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 같은 것이 씨알입니다."

그는 1989년 2월 사망했고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 묻혔다. 당시 전국민족운동연합은 애도 성명을 통해 "독재와 맞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 선생의 뜻을 이어 조국 통일의 그날까지 싸워나가겠다"고 밝혔다. 2002년 건국훈장이 추서됨에 따라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서 실렸습니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국립대전현충원#조문기#김준엽#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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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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