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옷걸이를 살펴보다 나가는가 했더니 다시 와서 뒤적였다. 저녁이었고 어디 갈 일도 없는데 이상했다. 뭔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조끼가 없어졌단다. 조끼라면 몇 주 전 아들이 커플로 사준 옷이었다. 요즘 입는 걸 본 적이 없어 마지막 입었던 곳을 생각해야 했다. 식당이었다. '아마도 밥 먹을 때 벗어 놓고는 그냥 왔나 보다'라고 일단락을 지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도 남편은 소리없이 조끼를 찾는 눈치였다. 내심 잃어버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이 방 저 방 옷걸이를 수색했다. 모른척하며 나는 식당 문이 열릴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갑자기 환호 소리가 터졌다. 남편의 목소리는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했을 때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조끼는 더 큰 패딩에 숨어 있었단다. "에이그!" 조끼를 안고 안면 가득 웃고 있는 남편에게 눈을 흘기며 등짝을 쳤다. 걱정했던 내 마음도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시원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자욱한 연기가
예전 같으면 한 마디 했을 거다. 잘 찾아보지도 않고 그랬다느니, 기억력이 없다느니, 털털하다느니 등등. 몇 마디 붙여가며 잔소리를 했겠지만 이미 기억력에 있어서는 내가 백기를 든 상황이었다. 올해만 해도 냄비를 숯검정으로 만든 일이 열손가락을 넘는지라 할 말이 없었다.
어제였다. 코에서 자꾸 냄새가 난다고 신호를 해왔다. 무시했다. 식탁에서 유튜브를 들으며 시화엽서를 그리고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가스레인지였지만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우리 집에서 나는 냄새는 결코 아니라고 확신했다. 점점 냄새가 진해졌다. 가까이 다가오는 냄새가 탄 냄새로 변할 즈음, 혹시? 하며 돌아보았다. 즐겨먹는 명탯국은 온데간데 없었다. 한 끼는 충분히 먹을 수 있었는데.
새까만 냄비 바닥을 수저로 긁어내고 철수세미로 문지르다 팔이 아파 결국 담가 놓았다.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 해도 태움의 역사는 남는다. 어처구니 없는 내 건망증을 떠올리게 하는 손잡이 냄비. 버리고 싶다가도 스테인리스 냄비의 체면과 옛정을 생각해 잘 닦아서 쓰자고 타협했다.
정작 요리를 하거나 식사 준비를 할 땐 실수가 적다. 가스불의 화력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내 계산이 문제다. 특히 밥을 먹고 난 후, 남은 찌개를 끓여놓는다고 가스 불을 당길 때가 가장 위험하다. 짧은 시간 지켜 서서 마무리 해야 맞는 일이다. 허나 그 잠깐 사이에 떠오르는 다른 일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부리나케 달려왔을 땐 음식은 재로 변하고 냄비는 불쌍한 신세가 돼 있다. 불쌍한 건 냄비만이 아님을 누가 알랴. 푸념을 해도 먹히지 않을 잦은 실수. 원망할 사람도 없어 한숨이 나온다.
올해 대박 사건은 쑥국이다. 화창한 봄날, 산책을 다녀와 점심을 준비하며 쑥국을 데웠다. 출출했던 참이라 불조절도 안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앞집 언니에게 파프리카를 전해 줄 일이 있어 문을 열었고, 언니는 차 한 잔 하자며 끌어당겼다. 내 머릿속 쑥국은 날아가고 앞집으로 건너가 한 시간의 수다로 허기를 채우고 나왔다.
"응? 이게 무슨 냄새지? 자기 뭐 올려놨어?" 앞집언니가 우리 집을 지명해 물을 때까지도 난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냄새로도 심각성을 느낄 정도였다. 나같이 조심성 많은 사람이 그럴 리는 없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자욱한 연기가 신발장까지 와 있었다.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싱크대로 달려가 바라본 냄비는 스테인리스가 아니라 냄비 모양의 숯이었다. 뚜껑까지 까만 그을음으로 쩔어 있었다. 수건으로 코를 막고 창문들을 열면서 당황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이러다 불이 나는구나.'
만일 앞집에서 밥까지 먹으라고 붙잡았으면 그날 우리 아파트 주차장엔 119 소방차가 등장했을 거다. 그리고 뉴스에 나왔을지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몇 해 전 이웃 아파트 한 채가 불나서 그 윗집까지 까맣게 그을린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봤었다. 상황이야 제각기 다르겠지만 '꺼진불도 다시 보자'라는 학창 시절 표어가 여전히 유효함을 깨닫는다.
기억력 대신 한뼘 자라는 이해력
기억력 감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면서 얻은 게 있다. 이해력이다. 남의 실수가 곧 내 모습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외출 시 마스크를 챙기듯 가스 불을 확인한다.
"여보, 약 먹었어?"
남편이 요즘 유난히 내 약을 챙긴다. 본인 혈압 약을 몇 번 깜빡하더니 밥 수저를 놓자마자 약을 복용한다. 식후 30분을 기억하는 것보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일 거다. '여보 약 먹었어?'라는 물음은 '나 약 먹으려고 해'라는 말로 들린다. 스스로에게 묻고 확인하는 절차에 아내를 살짝 끼워 넣은 것 같은 느낌이다.
부부가 비슷하게 늙어가는 건 위로가 된다. 머리카락, 주름살, 인지 능력은 물론이고 아픈 곳이 비슷하게 늘어간다. 노화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가장 가까이에서 알려주는 동지다. 웬만한 실수쯤이야 애교로 넘긴다. 냄비쯤이야 다시 사면 그만이지. 집만 안 태우면 돼. 조끼? 그건 아들이 사준 옷이니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오늘도 기억력 대신 이해력이 한 뼘 자랐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또는 브런치 게재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