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4.3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배보상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뉴스를 보면서 문득 제주로 귀향하던 5년 전, 1940년에 태어나 1948년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엄마의 생애에 대해 듣고 기록해 두었던 기억이 났다. 제주라는 한반도 끝 변방에서 태어나 4.3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이제라도 잘 정리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연재를 시작한다. 글은 엄마의 시점에서 서술했다. - 기자 말
막내와 오빠의 죽음... 그리고 자수
우리 가족은 마을 청년들이 얻어온 식량으로 간신히 굶주림을 면했다. 동굴은 여전히 춥고 습했으며 불편했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동굴에서 나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람과 달리 분위기는 점점 흉흉해졌다. 동굴 밖 곳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소리가 울렸고 그와 함께 우리들의 두려움과 공포도 점점 커졌다.
어느 날 우리 가족들은 막내 동생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을 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어버린 몸에 온기가 돌아오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막내의 식어버린 몸덩이는 더 이상 따뜻해지지 않았다. 추위와 배고픔이 계속되자 가장 연약한 갓난아기들의 숨이 먼저 멈췄다. 하지만 막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을 만큼 동굴 속 삶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죽음은 곧 동굴 생활의 고단함과 긴장 속에 묻혀버렸고 당시 채 열살도 안 된 나는 그 죽음을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다.
막내의 죽음 뒤 아버지는 더 이상 동굴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했고 우리 가족은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동굴 밖을 나서 피난길에 오르자마자 사방팔방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무섭도록 울려댔다. 총소리가 요란할수록 우리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비탈길을 오르던 도중 갑자기 오빠가 등에 진 이불과 함께 굴러떨어졌다. 오빠는 허둥지둥 몸을 세우고 비탈길을 다시 오르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토벌대들이 하얀 이불더미와 한몸인 오빠를 발견했다. 토벌대들은 오빠와 하얀 이불을 향해 사정없이 총을 쏘았고 총알이 박힌 하얀 이불더미는 금세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것이 큰 오빠의 마지막이었는데 당시 오빠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잇달아 막내와 큰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더 이상 피난가지 않고 자수를 선택했다. 우리 가족의 경로는 '습궤'에 있었던 대다수 동네사람들과 달랐는데 자수하러 가는 곳도 동네사람들이 갔던 곳과는 달랐다. 여러 가지 정보를 모은 끝에 아버지는 경찰에 친척이 있다는 누군가를 찾아갔고 거기서 자수를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자수를 했다고 해서 우리 가족을 둘러싼 삶의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이 곳 저 곳으로 자주 옮겨졌고 가는 곳마다 아버지는 '산에 어떻게 올라가게 됐는지, 혹은 누가 주동했는지' 등을 추궁 당하며 모진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엄마와 우리 남매들은 오빠와 막내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를 속절없이 들어야만 했다.
수용소로 끌려간 언니
결국 몇 번의 고문을 받으며 옮겨 다니던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가게 된 곳은 동부두의 주정공장이었다. 고구마를 가공하던 공장이라고 했는데 상당히 규모가 컸다. 하지만 그 넓은 공장도 산에서 내려온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남자, 여자, 부상자, 아이, 어른, 임산부 등이 모두 뒤섞여 한 창고에 수용되어 몇 달을 견뎌야 했다.
수용된 이들 상당수가 피난 생활과 도피 생활 중 가족의 일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에 지긋지긋한 공포를 피해 자수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지막지한 고문과 취조였다. 끔찍한 고문과 취조가 이어졌지만 그들 중 조리 있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열다섯 살이 넘는 모든 이들이 취조를 당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두서없는 진술 속에 더 큰 고문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나의 언니 역시 그렇게 해서 수용소로 끌려간 이들 중 하나였다. 오빠와 막내 동생에 이어 언니까지 우리 가족의 모습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1943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약칭 동척회사) 제주주정공장은 해방전후 제주도의 주요한 산업시설이었다. 제주주정공장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었으나 해방 후 되돌려졌다. 이 곳은 당시로선 비교적 큰 가공공장이었고, 그에 따른 창고도 역시 큰 규모였다. 이 주정공장 창고를 4․3 당시 수용소로 활용한 것이다. 특히 1949년 봄이 되면서 한 겨울을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피난입산자 중 살아남은 주민들이 대거 귀순하면서, 경찰지서나 군부대로부터 인계되는 귀순자들로 이 곳 주정공장 창고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귀순자를 한 곳에 수용했고 부상자와 임산부도 같이 수용했다.
혹독한 고문후유증과 열악한 수용환경 때문에 주정공장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아기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이 곳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일단 경찰서나 군부대에서 취조를 받고 수용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주정공장 내에도 경찰 특별수사대가 상주하면서 귀순자들을 취조하기도 했다. 청년층은 대부분 재판에 회부되어 육지형무소로 이송됐고 이들 중 대다수는 6․25 직후 집단희생 당한다. - 출처: '제주 4.3아카이브', 4.3평화재단
언니가 어딘가로 끌려가고 난 후에도 우리 가족은 산에서 내려온 다른 이들과 함께 동부두의 주정공장에서 몇 달 동안 집단생활을 했다. 주정공장에서의 생활은 동굴 생활보다 나을 바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좁은 곳에 다닥다닥 붙어 생활해야만 했고 고문을 받았던 많은 이들이 제대로 치료도 받지 않은 상태로 시름시름 앓았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몇 달 동안 공장에서 집단생활을 하다가 우리 가족은 고향 근처에 임시로 지어진 숙소로 거처를 옮겼다. 천이 흐르는 곳 양 옆으로 사람들이 머물 임시 숙소들이 죽 지어졌다. 그곳에서 몇 개월 생활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성을 쌓는 일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마을 성은 동네 사람들의 출입을 감시하는 한편 산사람들과 동네사람들이 서로 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마을을 둘러싸는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날랐다. 돌로 쌓은 성에는 가시덤불을 추가로 씌어놓기도 했다.
성이 다 만들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성 안에서 살아야 했고 서로 서로 힘을 합쳐 집을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앞이 안 보이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을사람들은 서로 의지했다. 이웃 중 누가 집을 짓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달라붙었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마을에서 모두가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품고 있었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각자의 처지들이 하나같이 남루하고 처참했지만 그래도 서로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찾아서 함께 했다. 어린 우리들도 손을 보탰다.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나섰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물허벅을 지고 나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다. 우리가 물허벅에 담고 온 물은 흙을 짓이겨서 벽을 만드는 데 쓰였다.
우리 집을 지을 때도 동네 사람들이 손을 보탰다. 돌과 진흙으로 벽을 세우고 이엉을 얹어 지붕을 만들어 간신히 우리 가족이 발 뻗고 비를 피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새롭게 마련된 보금자리에 짐을 부리자 나는 이제야 우리 가족이 온전히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다닐 걱정이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언니를 찾아 나설 궁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