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조전'의 어지러운 상황으로 김총재와 평민당이 곤경에 빠져있을 즈음에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 일어났다.
문익환 목사가 김총재의 동교동 집을 방문하여 방북 결심을 밝힌 것은 3월 16일이었다. 오랜 민주화운동의 동지이기도 한 문익환의 방북 결심에 김총재는 정부와 협의하여 방북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문익환은 정부의 승인없이 방북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일로 김총재는 서울 가든마포의 호텔에서 2시간 동안 안기부의 참고인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러야 했다.
"목사님이 평양으로 가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김주석의 결심을 타진해내는 일과 45년간 굳어진 장벽을 뚫는 일입니다."
"장벽을 뚫는 게 목적이라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주석 4)
김대중 총재는 이 때 여비에 보태쓰라고 문목사에게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30장을 건네주었다. 검찰은 문익환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자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잠입죄 등의 혐의로 구속하면서 김대중도 '자금 제공'을 이유로 기소했다.
문익환의 방북은 곧 정계에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정부 여당은 김대중 '여비지원'을 색깔론으로 매도하면서 이 사건을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다. 1989년 5월 23일 국회 외무ㆍ통일 상임위원회에서는 김대중 의원과 이홍구 통일원장관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일었다. 김대중은 국회 외무ㆍ통일 상임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직접 장관에게 캐물었다.
김대중 : 문목사는 개인 자격으로 북한에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김일성하고 무슨 얘기를 했건, 그 중에서 우리가 취할 것은 취하고 아니면 무시하면 되는데, 마치 문목사가 북한에 이 나라를 팔아먹으러 간 것같이 난리를 피울 이유가 있었는가?
이홍구 : 문목사님 방북문제는 그 동기가 순수성이나 그 목적성을 가지고 논의한 것이 아니고 헌행법을 위반했다는 실정법상의 문제이다.
김대중 : 장관은 문목사의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실정법 위반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는데, 정부 발표는 북한의 지령에 의한 적지 잠입이라고 했다. 다음, 김일성과의 면담 얘기를 살펴보자. 남북정상회담은 이유가 어찌 되었건 우리 남한 정부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문목사가 갔을 때 김일성이 처음 "노태우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고 대통령호칭을 붙였고, 또 조자양에게 같은 얘기를 했다. 이것은 굉장한 변화이다. 그러면 이것을 재빨리 잡아서 언제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하자고 제안해야 하지 않는가?
이홍구 : 정상회담의 중요성에 대해 정부의 입장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 따라서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생긴 것을 절대 정부가 가볍게 생각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밝힌다.
김대중 : (…) 문목사를 가두어 두고도 남북회담 전망에 지장이 없다는 뜻인가? (주석 5)
문목사의 방북사건에 이어 6월에는 평민당 소속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김총재와 평민당은 창당이래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김총재와 평민당이 과거청산과 개혁정국을 주도하자 공안세력과 노태우 정권은 서경원 사건을 빌미로 '김대중과 평민당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농민운동가 출신 서경원은 1988년 8월, 2박 3일간 북한을 비밀방문, 김일성ㆍ허담 등과 회담한 사실을 1989년 6월말 스스로 이 사실을 밝히고 안기부에 자진출두했다.
문익환 방북 이후 조성된 공안정국과 사회의 보수화 분위기를 증폭시킨 이 사건으로 서경원이 구속된 것을 비롯, 노태우 정권은 김대중이 김일성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서경원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인장을 발부하는 등 김총재 제거의 호기로 삼았다.
서경원 사건이 터지기 전인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단신으로 평양에 도착하여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뒤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임수경은 북한 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 현장에서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수세에 몰려 있던 수구세력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칼날은 김총재와 평민당에 집중되었다. 노태우정권과 수구세력, 보수언론이 민주화의 진척에 위기감을 갖고 기회를 노리던 중 일련의 방북사건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공안정국의 조성에 나선 상황이었다.
서경원 방북사건이 알려지자 평민당은 즉각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서의원을 제명하였다. 서경원은 가톨릭농민회의 추천으로 평민당에 입당하여 13대 총선에서 영광ㆍ함평에서 당선한 재야 출신이었다. 안기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평민당지도부까지 수사확대 방침을 밝히고 김총재에게 세 차례에 걸쳐 출석요구서를 발부, 김총재가 이에 불응하자 7월 27일 서울형사지법으로부터 구인장을 발부받아 강제 구인에 나섰다.
5공청산과 정치개혁을 주도해 온 김총재와 평민당에 대한 노태우 정권의 보복성 칼날이 조여들고 있었다. 덩달아서 검찰도 김총재가 서경원의 공작금 중 1만달러를 수수하고, 방북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불고지 혐의로 기소하고 출석을 요구했다. 안기부와 검찰이 합동작전으로 양날의 칼을 들이댄 것이다.
주석
4> 김영주, 『문익환평전』, 693쪽, 실천문학사, 2004.
5> 앞의 책, 747~745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