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때론 순간의 선택이 잊고 살았던 행복을 되살려주기도 한다. 그 순간엔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차선의 선택일지라도 예상치 못한 좋은 것도 함께 올 때가 있다는 걸 종종 깨닫는다. 나는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수놓던 홍대입구역, 연남동 근처에서 꽃 같은 20대를 보내고 신혼살림도 차렸다.
생뚱맞게 도봉으로 이사해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건 내가 33살 되던 해였다. 도봉은 서울살이 10년 동안 들어본 적도 와 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지하철 노선도 상에서 보이듯 그저 서울의 끝자락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 부부의 주머니 사정과 직장과의 근접성 등을 따지다 보니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갈 지역이 정해지고 나서 우리 부부는 망설임 없이 살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우리 집을 만났던 날, 정남향 베란다 창으로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에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서울의 변두리 도봉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런 연고도 매듭도 없던 곳에 말이다.
늘 오가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끄러운 동네를 벗어나 한적한 도봉으로 이사한 후 감사히도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삶의 질도 좋아진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신랑과 손을 잡고 집 앞 무수천과 중랑천을 따라 산책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이 많아졌고 도봉의 숨은 보물들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중에서도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로 무수골이다. 무수골은 집 앞 산책로를 따라 20여 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무수골의 매력은 도농의 경계에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여기가 도시인가, 시골인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나는 그 느낌이 참 좋다. 내가 시골 감성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동요 '동구 밖 과수원길' 노랫말을 떠올리면 나는 부모님의 과수원 가는 길이 떠오른다.
나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10대 유년기를 보냈다. 20대 제멋에 취해 살던 철부지 시절엔 두메에서 자란 게 부끄러워서 숨길 때도 있었다. 30대가 되어보니 그 시절 촌스러운 추억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내게 시골은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는 심리적 안식처인 셈이다.
치유의 장소, 나의 '리틀 포레스트'
시골스러움을 간직한 무수골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봄이면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수골계곡에서 개구리를 잡으러 다닌다. 그 모습에서 산으로 들로 진달래를 따 먹으러 다니고, 올챙이알을 찾아 도랑을 헤매던 어린 나를 본다. 여름이면 입은 옷 그대로 무수천에 몸을 담그고 노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 모습에서 너른 계곡을 찾아다니며 맨몸으로 다이빙을 하며 놀던 어린 나를 본다.
겨울이면 아이들이 꽁꽁 언 도봉산 계곡의 얼음 위에서 빙판 썰매를 타며 추운 줄을 모르고 신나게 논다. 그 모습에서 벼 끝동만 남은 채 얼어붙은 논바닥 위에서 썰매를 타고, 살얼음을 와장창 깨부수는 재미에 빠져있던 어린 나를 본다. 무수골 아이들이 노는 모습 한 장면 한 장면에서 어린 나를 만난다. 그 아이들의 눈에서 해맑은 동심을 느낀다. 또 내 아이도 자연의 사계 속에서 생기있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시골 소녀였던 작가가 서울 토박이 아이들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비로소 방학을 시골에서 지낼 수 있는 아이가 한 반에 불과 두세 명밖에 없다는 걸 알았고, 여름내 서울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토박이 서울 아이들한테서 마음으로부터 연민을 느꼈다. 너희들은 온종일 답답한 골목에서 공기나 고무줄을 하다가 기껏 어른을 졸라 일 전씩 까먹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너울대는 들판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 것이다. 서울 아이를 불쌍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돌아갈 시골이 있다는 것에서 느끼는 자부심에 무척이나 크게 공감됐다. 어린 시절 난 서울을 무척이나 동경하던 시골 소녀였다. TV로만 보던 수도 서울은 멋져 보였고 꼭 서울에서 살고 싶었다. 성인이 돼서 꿈에 그리던 서울시민으로 살게 되었지만, 도시의 삶은 상상했던 것처럼 녹록지 않았다.
빼곡하게 선 높은 빌딩과 크고 작은 집들 사이에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직장인의 삶에 지쳐갔다. 그래서인지 한 번씩 고향을 찾을 때면 모든 걸 내려놓고 푸릇푸릇한 자연 속에서 내 한 몸 누이고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돌아갈 시골이 있다는 것은 참말로 감사한 일이다. 내게 촌은 부모님의 품이자 동심의 회복이다.
언젠가 부부교육을 듣다가 '우리에게 치유가 되는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신기하게도 나는 경북 상주의 산골짜기에 있는 '고향마을'이라고 답했고, 신랑은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을 낀 구례구역 앞의 작은 마을에 있는 '외가'라고 답했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있을 때 평안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한평생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자연과 더불어 뛰놀던 추억은 어려서나 자라서나 허기진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세 살배기 내 아이와 함께 수시로 무수골을 걸으며 우리 부부는 소망한다. 아이가 무수골 자연과 함께 한 추억을 간직한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처음엔 그저 현실적 상황을 따라 이곳으로 왔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니 도봉은 우리 부부의 가슴속에 오래전부터 내재해 있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줬다. 하나씩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우리가 가는 발자국마다 행복이 널려있었다. 어쩌면 '리틀 포레스트' 같은 삶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