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길 위에서 끝이 없다'는 말이 있다. '길'은 '집'과 더불어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가장 주요한 공간 중 하나다.
길은 또한 변화의 장소다.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내는 길은 없거나 매우 드물다. 시대와 세상의 흐름에 따라 길은 형상을 달리하며 시시각각 변한다. 그게 길의 타고난 운명이다.
한때는 호화찬란한 건축물이 가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 막막한 폐허가 되기도 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산새만이 조용히 지저귀던 오솔길이 거대한 도읍(都邑)의 광대한 길로 바뀌기도 했던 게 우리가 지나온 역사였다.
그래서 길을 살핀다는 건 축적된 인류의 문화를 탐구하는 것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트렌드를 읽어내는 요긴한 수단이 되고 있다.
여기 명멸해온 '길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곳이 있으니 바로 경상북도 경주의 '황리단길'이다. 경주 청년들은 물론 인근 대구와 부산, 멀리는 서울과 경기도의 젊은이들까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길'로 떠오르고 있는 서라벌의 핫 스폿(Hot spot).
차가운 하늘이 투명하게 푸르던 오후. 경주 관광의 핵심 포인트로 부상하고 있는 황리단길을 찾아갔다.
최근 경주의 자랑으로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길'
지금으로부터 10~15세기 전.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궁궐과 석탑, 불상과 금관 등 매혹적 조형물을 만들어냈던 신라. 그 문화재와 유적들은 고스란히 경주의 매력적인 관광 자산이 됐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거에 멈춰있거나, 지난날의 영화에만 의지해 현재와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의 손때 묻은 각종 국보와 보물이 신라의 옛 자랑이라면 황리단길은 2021년 현재 경주의 자랑이다.
이를 감안한 듯 경주시가 운영하는 인터넷 문화관광 홈페이지엔 아래와 같은 말로 황리단길이 지닌 위상이 설명되고 있다.
"황리단길은 경주에서 가장 젊은 길이다. 몇 해 전부터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분위기 좋은 카페, 아기자기한 소품점, 기념품 가게, 개성 있는 식당들이 생겨났다. 초기에는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점들이 들어섰는데 황리단길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골목마다 개성 있는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 길은 '핫'하다 못해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가 됐다. 검색했던 카페를 찾아 가거나, 거닐다 눈에 들어오는 식당 문을 두드려 보거나, 경주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찾아가 경주를 기념하는 기념품을 찾거나…."
실제로 찾아본 결과 경주시가 가진 황리단길에 대한 자긍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었다. 황리단길을 방문한 건 평일 한낮이었다. 한국의 어느 관광지에도 사람이 드문 시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창졸간에 찾아온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폭풍은 너무나 오랜 시간 한국을 공황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여행지와 관광지가 예전처럼 찾아주지 않는 방문객들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럼에도 그날 황리단길엔 많진 않았지만 마스크를 쓴 채 손을 맞잡은 20~30대 연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구입하는 것들은 경주의 지역경제 재활성화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
황리단길은 타 지역에서 거길 찾는 이들이 편하게 접근하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적한 거리를 걸어 겨우 15분이면 황리단길과 만날 수 있는 것.
터미널 주변엔 자전거와 스쿠터, 전동 킥보드를 대여해주는 상점들도 있다. 몇 천 원에서 1~2만 원 정도면 황리단길을 포함한 '서라벌의 보물'로 불리는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황리단길의 연인들 "한적하고 세련된 카페가 좋아요"
황리단길로 들어가는 내남사거리에서 대학원생과 대학생, 한 쌍의 연인이 타고 가던 분홍색 스쿠터를 세우고 물었다.
"두 분은 경주가 처음인가요? 여기 어때요?"
대구에서 왔다는 커플은 이미 경주를 여러 차례 찾았다고 했다. '조용하고 독특한 데이트 장소'로 대릉원과 교촌마을을 치켜세운 남학생은 "얼마 전부터 세련된 카페와 특색 있는 맛집이 하나씩 늘어가는 황리단길에서 식사를 해결할 생각"이라며 빙긋 웃었다.
그들의 말처럼 이탈리아 파스타에서 베트남식 스프링 롤, 푸짐한 한식에서 깔끔한 일본 요리까지 각자의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황리단길의 메뉴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고 있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황리단길 곳곳엔 낡은 가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현장이 적지 않다. 그곳들의 대부분은 분명 색다른 레스토랑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로 변신을 시도하지 않을까?
천년왕국 경주가 아니라면 쉽게 지을 수 없었을 '능(陵·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이라는 이름의 커피숍이 눈에 들어왔다. 신라 왕의 유택처럼 조용한 카페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누리는 재충전의 시간이 좋았다.
곧이어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식당 역시 저렴한 가격에 갈비탕과 도가니탕, 해장국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도 맛이지만,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영어, 일어, 중국어까지 쓰여 있는 친절한 메뉴판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상당수의 황리단길 식당이 이런 메뉴판을 갖췄다고 한다. 이는 '글로벌 관광지 경주'를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몇 해 전이다. 비엔나(Vienna), 오흐리드(Ohrid), 티라나(Tirana) 등 동유럽 도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이곳들 역시 경주처럼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곳.
경험에 따르면 거기에도 고풍스런 성당과 원형 경기장 등 중세의 향기를 간직한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젊은이들의 즐겨 찾는 '새로운 길'이 병존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유사(類似) 황리단길'은 동유럽에도 존재하는 셈이다.
독일 속담 가운데 "집에선 좋은 식구와 이웃이 필요하고, 길에서는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게 있다.
지금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아니면 걸어서 황리단길을 돌아보는 청춘들은 앞으로 살아날 기나긴 날을 함께 동행할 '친구'를 만들고 있는 줄도 모른다. 아쉽게도 찰나처럼 짧았던 청춘의 시간을 통과해버린 중년과 노년들에겐 부러운 풍경이다.
'젊은 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고분(古墳)들
"경주 황리단길은 새롭고 젊은 공간"이라는 것에 이론(異論)을 재기할 사람들은 많지 않다. 새롭게 모습을 바꾼 고옥(古屋) 속에 채워지고 있는 21세기형 문화·관광 콘텐츠들.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맛집과 찻집, 신세대 감각에 적절하게 부응하는 사진관과 액세서리 가게, 여기에 옛 가옥을 예쁘게 단장한 한옥 숙소들까지.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의 요구를 다양한 측면에서 만족시키는 황리단길. 여기에 보너스 같은 아름다움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거대한 고분들.
황리단길 끝자락에 서면 쌍상총, 서봉총, 금령총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척엔 천마총과 황남대총도 있다. 고분 앞 벤치에 앉아 아득하게 느껴지는 1천 년 전 신라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빼놓으면 아쉽다.
세상보다 한 걸음 앞서 걸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은 "나는 똑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 문제 해결에 노력했을 뿐"이란 말을 남겼다.
서라벌의 '오래된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고대 유적과 '새로운 보물'로 떠오르고 있는 황리단길. 이 두 가지를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고 균형 있게 보존·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경주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황리단길에서 마음속으로 떠올린 물음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