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프로그램의 방송작가가 방송사 지휘·감독을 받는 '부하직원에 가깝다'고 법적으로 판단한 첫 사례가 나왔다. 지난해 12월 전주KBS 방송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전북지방노동위원회(전북지노위)는 '상시 해고' 근거가 돼왔던 1년 단위의 계약 기간도 '사용자가 우월적 지위에서 정한 형식에 불과하다'고 밝혀 방송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2월 9일 전북지노위가 A작가의 부당해고를 인정한 사건 판정서를 보면, 전북지노위는 A작가가 "드라마작가, 번역작가와 같은 다른 방송작가와는 달리, 토론 주제 결정이나 원고 작성 시 독자적이고 고도의 창의성이 반영될 여지가 많지 않고 담당 PD와 방송국이 정한 토론주제와 토론자에 대한 질문에 따라 원고를 작성했다"며 "업무 대부분에 사용자(전주KBS)의 지휘·감독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A작가는 2015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전주KBS에서 일했다. 퇴사 직전 1년 동안은 매주 화요일 밤 10시부터 1시간 가량 방영되는 '심층토론' 프로그램에서 일한 '시사·교양 작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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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노위는 A작가가 "용역계약 당사자라기보다 소속 팀원 내지 부하 직원으로 취급됐다고 보는 게 상당하다"고도 밝혔다. A작가와 방송국이 쓴 작가 집필 계약서(프리랜서 용역 계약)가 형식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어 "프로그램 기획, 출연자 섭외 등 구성 활동 대부분은 사회적 영향이 큰 시사 프로그램 특성상 A작가가 독자적으로 했다고 보기 어렵고 대부분 담당 PD와 방송국 결정에 따라 출연진 연락, 토론자 배치 등 실무를 한 걸로 보인다"고 밝혔다.
계약서상 월급이 아닌 '주급'으로 작가료를 지급했다는 방송국 주장엔 "근로기준법상 임금은 매월 1회 이상 일정한 날짜를 정해 지급하면 되는 것"이라며 "양자 간 약정에 따라 일급, 주급, 월급으로 지급하는 건 산정 방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정직원처럼 고정적으로 출·퇴근하지 않았다'는 주장에도 "근무 시간·장소는 고용된 근로자라 해도 근기법 52조에 의한 선택적 근로시간제로 근로하거나 코로나19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재택 근무 등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면서 탄력적으로 변동 가능하다"며 "방송국에 A작가 좌석이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방송사가 근로 시간과 장소를 적극 지정하지 않았단 이유만으로 성급히 근로자성을 부인해선 안된다"고 밝혔다.
전북지노위는 그러면서 A작가가 근로소득세가 아닌 '개인사업자'가 내는 종합소득세를 낸 점이나 고용보험이 아닌 예술인고용보험에 가입한 사실에 "방송사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임의로 용역계약으로 취급해 통상 근로자에게 적용하는 규정을 배제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1년' 쪼개진 계약 기간도 "사용자가 정한 형식일 뿐"
방송작가들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계약기간' 판단이다. 프리랜서 작가들은 1~2년 단위로 계약서를 쓸 때가 많다. 이 경우 해당 작가가 노동자로 인정받는다 해도, 방송사는 '1~2년 기간제 계약직'에 불과하므로 계약 기간이 만료됐다는 논리를 펼칠 수 있는 것.
전북지노위는 A작가가 퇴사 직전 체결한 '1년' 계약 기간을 두고 "이전 구성작가가 4년 6개월 일한 것 등을 고려하면, 더 이상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 있는 사유가 A작가에게 있거나 A작가가 이직하거나 심층토론 프로그램이 폐지되지 않는 한 계속 종사할 수 있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계약서상 계약 기간이 아니라 A작가 업무가 방송사 지휘를 받는 상시·지속적 업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은 것.
또한 방송사들이 제작진 교체 이유로 삼는 방송 개편이나 프로그램 폐지에도 "사용자 경영에 관한 의사결정일 뿐"이라고 선 그었다. A작가를 비롯해 다른 작가들이 2년 넘게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사실을 들며 "A작가가 계약 체결 당시 묵시적으로 기간제 계약을 체결했다고 볼만한 신뢰가 형성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냈다.
이에 따라 "A작가가 작가 집필 계약서를 쓴 건 맞으나, 예술인 복지법 시행(2020년 6월), 국회(국정감사) 지적 등에 따라 서면 계약을 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사용자가 우월적 지위에서 일방으로 추진한 것으로 작가가 이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계약서상 기재된 1년의 계약기간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전가의 보도 '방송 개편' 핑계도 제동
A작가를 대리한 김유경 노무사(돌꽃 노동법률사무소)는 "70쪽이 넘는 지노위 사건 판정문을 본 건 처음이다. 그만큼 위원들이 구체적으로 심사숙고한 결과로 보인다"며 "계약기간 판단 부분이 정말 중요한데, 방송사들은 보통 '1년 짜리 계약을 네가 다 이해하고 읽고 서명했으니 의사합치가 된 것'이라며 작가들을 내보내왔다. 그런데 이번엔 '1년 기간이 정해졌더라도 그건 형식에 불과하다'는 명시적인 판단이 나왔다"고 평가했다.
김 노무사는 "작가들 계약서엔 '방송 개편 때까지'를 계약기간으로 정하는 경우도 매우 많다. 이와 관련해서도 첫 판단이 나온 셈"이라며 "근로관계의 계속성을 인정하고 개편·폐지는 경영자 사정임을 명확히 하면서, 방송사들이 언제라도 프로그램 개편 등을 이유로 '나가야 돼'라고 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세웠다"고 밝혔다.
방송작가유니온은 12일 "특히 '방송작가 집필 계약서는 사용자의 일방적 의사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계약 해지와 단기간에 계약이 해지되는 것을 방지해 방송작가의 고용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며 방송작가 계약서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의의와, 그동안 해고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계약서의 맹점을 밝혀줬다"며 전주KBS에 "KBS는 중노위 재심청구를 포기하고 해고 작가를 당장 복직시켜라"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