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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세수한 사람처럼 보여. 출근할 때는 화장을 좀 해야지."

이십 년 전, 내가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 들었던 말이다. 그 후로도 나는 많은 말을 들었다. 몸매 품평도 있었고, 피곤해 보이는 날이면 남자친구를 만났냐, 밤새 뭐했냐는 질문을 들었다. 밥을 많이 먹을 때면, "남자들은 은근히 그런 거 안 좋아해" 하는 맥락 없는 말도 들었다.

일하러 왔는데 화장은 왜 해야 하는지, 내 몸이 그에게 무슨 상관인지, 전날 밤 나의 행적이 왜 궁금한지, 내가 밥을 먹는데 남자들의 기호를 왜 신경 써야 하는지, 하나 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고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하면, 나는 웃었다. 늘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 마냥 웃었다. 웃고 나면 별 다른 대답이 필요하지 않아서, 그래서 웃었다. 그러고 나면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왜 웃었지? 나는 왜 웃는 거야?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건 타인이었는데, 갈수록 내가 싫어졌다.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선택한 가해자 언어

늘 소극적인 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하나를 받으면 둘로 대응했다. 몸매를 평가하면 그의 몸도 평가했다. 성적인 이야기를 하면, 그보다 더한 음담패설을 쏟았다.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가해자의 언어를 썼다. 당시의 나는, 이것이 내가 지지 않고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나는 갈수록 내가 더 싫어졌다.

웃고, 같이 떠드는 나의 모습.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건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침묵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아서, 나는 여전히 그 일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미투 운동이 일어날 때, 내 주위에서도 쉴 새 없는 증언들이 튀어나왔다. 존경하던 교수님께, 직장 상사에게, 선배에게, 무수히 많은 말과 행동을 들으며 버텨온 이들이 내 곁에 있었다. 그제야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아주 조금은 기뻤고, 또 아주 많이 아팠다.

갑자기 그때 느꼈던 절망감이 되살아난 것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의 발언 때문이다. 

MBC 시사프로그램 '스트레이트'는 지난 16일, 김건희씨와 '서울의 소리' 이명수 기자의 통화 녹음 파일 중 일부를 보도했다. 대화 와중에 그녀는 "나랑 우리 아저씨(윤석열 후보)는 안희정 편"이라고, 진보진영에서 미투가 터지는 건 "돈을 안 챙겨주니까"라고 말했다. 또한, 법원에서도 이미 판결이 난 해당 사건을 두고 "둘이 좋아서 한 걸 갖다가"라고 폄훼했다.

이번은 다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허위경력 의혹 등에 대한 입장문 발표를 하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허위경력 의혹 등에 대한 입장문 발표를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사실 나는 김건희씨에 대한 어떤 의견도 갖고 있지 않았다. 허위 경력으로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다면 그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외 어떤 의견도 없었다. 특히 그녀의 결혼 이전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 논란 속에서 지긋지긋한 여성 혐오를 느낄 뿐이었다. 여성의 성공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들 말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다르다. 윤 후보 측은 "송구스럽다"는 입장을 표했지만 나는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직접 사과하기를 바란다. 사과한다고 해서 이미 저지른 죄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과해야 한다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인간 된 도리를 보여주는 거라고 믿는다.

어쩌면 그녀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의 언어를 배우게 되었을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특정 사건의 피해자뿐 아니라,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했다는 것이다. 사과하시라, 나는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나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을 뿐이지만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나를 또 싫어하게 될 것만 같아서, 작은 목소리를 내본다. 

#대선#김건희#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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