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확대된 기후위기에 대한 국제적 논의는 그린뉴딜(환경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뜻하는 말)과 ESG 투자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고 2050년에는 넷 제로(국내 순배출량 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천명했다.
이러한 탄소중립의 동의어는 '에너지 전환'이다. 탄소를 내뿜는 화석연료 에너지원에서 탈피해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에서 에너지 전환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이런 '발전원' 이슈에 방점이 찍혀 있다.
특히나 원전을 둘러싼 양 진영의 대립은 정책을 넘은 이념 공방전의 영역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인류학자 크레천 바크의 <그리드>는 우리가 에너지 전환을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얘기해야 할 '전력망'에 관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그리드'란 '네트워크와 함께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선로 및 관련 시스템 전반'을 의미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드의 구조는 '발전소에서 시작해 토스터기에 도달하는 직선형이 아닌, 발전소에서 시작해 발전소에서 끝나는 거대 고리 모양의 구조'이다.
우리가 비유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전기는 물과 같이 저수지에 저장해 두고 수도관으로 조절하여 공급할 수 있는 유체(流體)가 아니다. 전기에너지는 '전하들이 큰 전압 차로 분리된 상태'에서 발현되는 힘(force)이다. 수요와 공급이 실시간으로 일치해야 하고 이를 연결 짓는 송배전망이 중요하다.
19세기 패러데이와 에디슨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하는 책은 미국의 사례들을 바탕으로 그리드적 관점에서 오늘날 에너지 전환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석탄화력과 같은 전통적 에너지원에 기인한 '규모와 효율의 그리드 시스템'은 오늘날 재조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노후화된 인프라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는 재생에너지와 조화롭게 운영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의 가장 큰 특징은 '변동성'에 있다. 재생에너지는 그때그때 전력을 조절해서 생산할 수 있는 발전원이 아니다. 태양빛이나 바람세기 같은 변덕 있는 자연환경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날은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 전력을 덜 생산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필요한 것보다 전력을 더 생산할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전력을 더 생산하면 좋은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드 시스템에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실시간으로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혁신이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에너지 저장기술장치 ESS'의 여러 형태를 고려할 수 있다. 배터리, 양수발전 등 기술과 인프라를 더욱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앞으로 '더 작고, 더 지속적이며, 더 독립적이고, 더 회복성 있는' 마이크로 그리드를 통해 지역적으로 분산된 그리드 망 네트워크를 만드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전체적인 송배전망의 연결성과 재설계가 필요하다. 전력의 수요와 공급 사이를 연결 지을, 다시 말해 대도시권과 지방 배후지를 연결 지을 수 있는 그리드 망을 새롭게 짜 나가야 한다.
이러한 그리드적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가장 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지역 불균형'이다. 한국 사회에서 전력 수요는 수도권에 몰려 있다.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장 등이 더욱 집중되면서 수도권의 전력 수요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전남 지역에서는 태양광, 풍력 등 수요에 비해 초과 공급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다면 수도권으로 전력을 끌어주는 송배전망 인프라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어느 사람이 자기 땅에 송전탑 세우는 걸 두 손 벌려 환영하겠는가. 또한 현재 한전이 독점적으로 그리드 망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러한 재조정 과정에서 투입되어야 할 비용을 현재 전력요금 수준에서 충당 가능한지에 대한 문제의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면 에너지 전환의 문제는 우리가 당위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사안이 아니게 된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명확하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전환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떤 리스크가 따를 것이고 그 리스크를 어떻게 해소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합의를 요구로 하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에서 크레스천 바크의 <그리드>는 전력망의 역사를 톺아보며 이러한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있다. 오늘날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을 고민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춰봐야 할 논의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