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0일 대전국립현충원에서는 해병 7기 김창선 일병(향년 90세)의 안장식이 가족과 지인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는 지난 1950년 해병대원으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 옹진반도 전투에 참가했고 한 쪽 눈을 실명당하는 전상을 입었다. 이후 국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제대했으며, 국가유공자 상이용사로 지정돼 연금을 받아왔다. 그는 이러한 참전용사 자격으로 현충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그는 참전용사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건으로 더 유명하다.
전세계가 주목한 매몰 광부 생환 작전
1967년 8월 22일에 발생한 이른바 '구봉광산 매몰사건'. 충남 청양군 사양면(현 남양면)에 있는,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이었던 구봉광산이 붕괴되면서 지하 125m 갱도에 갇혀 있다가 15일 8시간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인물이 바로 그다. 이 기록은 1995년 6월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박승현양이 15일 18시간 만에 구조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매몰사건 생존기록 최장시간으로 남아있었다.
양수기 기술이 있던 김창선씨는 구봉광산에 취업한 지 6년 후인 1967년 8월에 갱 속에서 지하수를 퍼내는 양수작업을 하다가 금광이 무너지면서 갱도에 갇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암흑천지가 돼 무덤과도 같았던 지하에서도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했다. 해병대에서 통신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대피소에 있던 망가진 군용 전화기를 이용해 외부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이 일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구출하라"는 여론이 급등했다. 전국의 일간지, 주간지 등 130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 <제주일보>, <뉴욕타임스> 기자도 청양으로 급파돼 취재경쟁을 벌였다. 당시 취재차로 많이 쓰던 검은색 지프가 청양 거리를 메울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조그만 도시 청양으로 모였다. 청와대까지 나서서 비서관을 현지에 급파해 조속히 구출하라고 독려했다.
김창선씨 구조작업에는 15일간 연 인원 2200여 명이 동원됐으며 미8군 MARS 헬리콥터와 전기톱 등 장비가 지원됐다. 또 미국의 구출 전문회사인 더쳐 사는 전문가 자문을 구하며 장비를 동원해 구조 활동을 도왔다.
이후 구조진행 상황과 김씨의 상태가 언론에 연일 중계됐다. 한 치 앞도 분간 안 되는 어둠 속에서 공포와 배고픔에 떨었던 그는 전화를 통해 때로는 생존에 대한 희망을 갖고 음식을 달라고 전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세상에 나아가 인사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다"라는 절망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때마다 언론들은 "아직도 살아있다"고 대서특필했으며 국민들은 가슴을 졸이며 이를 지켜봤다.
김씨는 파이프에서 간혹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며 연명했고, 200W짜리 전구를 끌어안으며 체온을 유지했다. 매일 아침 통화를 통해 건강을 체크했다. 생환을 애타게 기다리던 국민들은 김씨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67년 9월 6일 밤 9시 15분. 드디어 금광 지하 125m 갱 속에 갇혀있던 김창선씨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구출되는 상황은 당시 KBS 라디오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고 갱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전 국민은 "만세"를 외치며 박수를 보냈다. 이 광경은 국내는 물론 일본 NHK 등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졌다. 바로 55년 전의 일이다.
"고맙습니다, 살아나왔습니다."
하지만 청양 구봉산 광산 붕괴는 성장 제일주의만을 앞세워 안전이 뒷전으로 밀려 일어난 사고였다. 당시 노동조합원이 회사 측에 갱내 수리를 진정했지만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 진행시켜 일어난 사고였다.
"양창선이 아니라 김창선"... 해병대전우회 봉사도
사고 발생 후 4년 만인 1971년 구봉광산은 폐광됐다. 금 생산량이 월 6kg에 머물러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한때 월 산금량이 150kg에 달했던 굴지의 구봉광산은 12만 청양군민의 돈주머니 역할을 했다. 하지만 폐광 이후 청양군은 활기를 잃어가며 50년이 지난 지금은 인구 3만의 충남 최약세 군이 되었다.
사고 당시 그는 '양창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본명이 김창선이었지만 입영통지서에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양씨로 굳어졌다고 한다. 김씨가 갱 안에 갇혀있을 때 부인과의 통화에서 "아이들을 잘 키워달라"고 유언했고, 이어 당국자와의 통화에서 "나는 양창선이 아니다. 김씨로 성을 바꿔달라. 죽더라도 김씨로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구출되고 난 뒤 당국의 도움으로 이름을 되찾았다. 사고 이후 김씨는 청양을 떠나 부여로 옮겨 잠사회사에서 근무했으며, 최근까지도 부여 해병대전우회에서 꾸준하게 봉사활동을 했다.
부여해병전우회 이순영 회장은 "김창선 대선배의 빛나는 일생을 본받아 살고 널리 기리겠다"고 전했고, 구본중 대원은 "평소 후배들을 아들처럼 애정으로 대해 주셨고, 봉사활동에도 솔선수범해하셨다"고 기억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장병7묘역 715-74282에 안장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