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
해가 꽤 길어졌다. 퇴근길인데도 낮처럼 환했다.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배도 고프고 마음에도 허기가 졌다.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종일 바삐 보내다 보니 벌써 방전되어 버린 느낌이다. 지칠 대로 지쳐 헛헛하고 텅 빈 마음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할 것만 같다. 냄새가 나를 유혹하지만 오늘은 패스다. 중요한 모임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녁 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 버렸다. 저녁을 먹고 할 일들을 정리한 뒤, 방에 들어와 줌에 접속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주소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잠시 기다리면 까만 화면에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 둘 나타나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근황을 나누다가 사람들이 다 모이면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림책을 읽어나가며 의견을 교환한다.
한 달에 한 번, 이 시간만 기다렸다
작년부터 그림책테라피스트 동기들과 함께 한 달에 한번 매주 둘째 주 금요일 밤을 보낸다. 좋은 그림책을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이론서를 함께 읽으며 책에 담긴 주제에 맞춰 테라피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그림책을 각자 네 권씩 골라서 모인다. 각자 만들어 올린 자료와 그림책을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며 스터디를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나와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있어도, '그렇구나'라고 이해받고 존중받는다.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솔직한 모습을 얼마든지 드러내도 괜찮다. 비판 없이 나의 시간, 경험,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을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남의 그것을 들으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간다. 그 사이 그림책이 삶 속에 스며든다.
바쁜 일과로 살짝 지쳐 있었어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서히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밤 9시 반에 시작된 모임은 새벽에 가까워져 끝이 난다. 피곤하지만 가슴은 두근두근 설렌다. 어느새 '직원 OOO', 'OO 엄마'라는 역할의 옷을 벗고 바로 내가 되어 있다. 힘들어도 다음 모임을 기다리고 준비하게 되는 이유다.
이날도 동료가 매력적인 그림책 한 권을 들고 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양을 쫓는 모험> 등의 표지로 유명한 사사키 마키가 그리고 쓴 <이상한 다과회>다.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다과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흥미로운 여정과 흥겨움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드라큘라 전설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책을 보자마자 '이거 딱 우리(그림책 공부하는 사람들) 이야기잖아!'라고 생각했다. 기다려지는 일이 있고, 누군가와 그 설렘을 나누고 있다면 이 그림책이 전하는 기쁨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을 읽기 전의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설렘을 잊은 지 오래였다. 시간이 생겨도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많았다. 주로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에 나를 맞추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직 속, 한정된 역할에 맞춰 사는 삶에 익숙해지자 사고와 행동도 그 틀 안에서만 움직였다.
사람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나를 조금씩 되찾았다. 그림책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양한 눈과 목소리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좋은 도구다. 정답이 있거나 성과를 내야 하는 일도 아니므로 편안하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한껏 열려있는 그림책의 그림과 문장에 기대어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내가 잊고 지냈던 내 모습이다.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열심히 대답하는 사람들을 본다. 나의 대답도 진지하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저렇구나.' 공감하다 보면 잊었던 내가 기억나고 앞으로의 나를 새롭게 꿈꾸게 된다. 그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일과 역할에 눌려 납작해진 나의 자아가 서서히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뭐든 꿈꿔 보고 싶다는 용기가 차오른다. 설렘이 일상으로 돌아온다.
얼마 전 지하철 청소 노동자들이 춤에 도전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60대 초반의 한 여성이 몸으로 이름을 쓰는 동작을 해 보고는 자기 이름을 그렇게 힘들게 써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한동안 자신을 잊고 살았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며 눈시울을 붉히는데 마치 사람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을 때 내 마음 같아서 덩달아 눈물이 났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그림책 한 권으로 완전히 없앨 수야 있을까. 하지만 그림책을 나누며 얻은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반복되는 일상이 환기된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고, 기대되는 일 하나가 무기력한 일상을 가볍게 살아가게 하는 활력소가 된다.
먹고사는 일과 다른 일이 주는 기쁨
그것이 내게는 그림책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활동이 될 수 있겠다. 혼자일 때도 즐겁지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 나누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공유하는 정보의 질과 양은 말할 것도 없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이상의 시너지에 양적, 질적 확장이 일어나고 연대감을 느끼며 그 취미를 더욱 즐길 수도 있다.
타인의 새로운 시각이 더해지면 익숙하던 일도 완전히 달리 느껴지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금세 식어버릴 수도 있는 관심사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크다. 다른 사람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통해 지속적인 동기부여도 된다. 그 일을 더 오래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워킹맘이다 보니, 육아와 살림, 일을 하면서 모임에도 참석하려면 시간 활용을 잘해야 한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의견을 나누고 글로 그림책을 소개하면서 남들 앞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기술, 글쓰기 실력도 조금씩 향상되었다.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좋아서 하는 일이 일상을 든든하게 받쳐주자 자존감도 동시에 올라간다.
'먹고사니즘'을 떠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 그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일상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는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대로 삶을 즐길 힘이 바로 내게 있다는 걸 일깨운다. 남의 인정, 시선과 무관한 순수한 행복이다.
그렇게 얻은 행복감은 당장 수치로 환산되지는 않아도 일상을 달콤하고 단단하게 채운다. 같은 즐거움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사람들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든든함은 굳어서 삐걱대기만 하는 정신의 관절에 기름칠을 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마음대로 되는 일도 없고 삶이 재미없다면 좋아하는 일로 소소한 기쁨을 찾아보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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