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105년 만에 국가 부도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는 16일(현지 시간)까지 달러로 표시된 러시아 국채와 관련해 이자 1억1719만 달러를 채권자들에 지급해야 하지만 이미 "루블로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방의 채권자들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아 부도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세계 각국은 러시아의 채무불이행(디폴트)이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디폴트가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관론도 나온다. 실제 지난 1988년 세계 증시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사태'로 출렁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의 채무가 많지 않은 데다, 세계 각국의 금융 제재로 돈이 있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만큼 당시 같은 충격은 없으리라 보는 의견도 적지 않다.
러시아 디폴트 사태, 이미 시작됐다
러시아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이미 세계적인 신용평가사들은 러시아의 디폴트를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8일 러시아의 장기신용등급을 B에서 C로 6단계 낮췄다. 피치의 신용등급 체계상 C는 디폴트 직전 단계다.
피치뿐 아니다.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3일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기존 BB+에서 CCC-로 8단계 강등했다. 국가부도 단계인 D 등급보다 두 단계 위지만, CCC-는 투자 시 원리금 상환이 의심스러운 수준의 등급이다. 무디스 역시 러시아 95개 기업의 신용등급을 B3에서 Ca로 4단계 내렸다. 무디스는 "러시아 거시경제 안정에 대한 심각한 위험과 중앙은행 자본 통제 및 국가 채무 상환 지연에 따른 금융 여파"라고 밝혔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세계 4위인 6302억 달러다. 절대량만 놓고 보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세계 각국의 러시아 자산 동결 조치로 절반에 가까운 돈이 묶여 있다는 게 문제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화 상당수는 현재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의 중앙은행에 보관돼 있다. 게다가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 주요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내쫓기도 했다. 러시아 경제 주체들이 다른 나라와 돈을 주고받거나 금융 거래할 길이 원천봉쇄됐다는 뜻이다.
금이나 중국 위안화 증권, 국제통화기금(IMF) 포지션으로 구성된 나머지 외환보유액 또한 서방 경제 제재로 인해 사용하기 어렵다. 결국 러시아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외환보유액은 300억 달러 수준이다.
게다가 러시아 정부는 자국 경제 제재에 동참한 48개국을 이미 비우호국으로 지정하고, 이들 국과 관련한 채무를 달러 아닌 루블화로 상환하겠다는 방침을 여러차례 밝혀왔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러시아 국영 TV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서방의 제재로 달러 결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루블화를 통한 상환만이 최선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금융업계는 루블화 가치가 사상 최저치로 떨어진 상황에서 이같은 방침을 밝힌 건 '돈을 갚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보고 있다.
안톤 실루아노프 재무장관은 16일 러시아 RIA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돈을 갖고 있고, 우리는 돈을 지불했다"라며 "외화에 대한 우리의 채무 이행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이제 공은 미국 당국의 편에 있다"라고 밝혔다.
이달까지 러시아가 갚아야 할 달러 표시 국채 이자는 총 7억3000만 달러로, 우리 돈 9000여억원 수준이다. 16일 1억1719만 달러를 시작으로, 21일엔 6563만 달러, 28일과 31일엔 각각 1억200만 달러와 4억4653만 달러를 상환해야 한다. 다음달에도 21억2938만 달러에 달하는 원리금을 상환해야 한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서방 세계의 제재에 직면한 러시아는 외화자산의 역외반출을 금지하는 자본통제를 하고 있어 상환 일정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며 "스위프트 제재로 자금의 원활한 이동이 막힌 점도 디폴트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위험 커진 신흥국 시장
러시아의 디폴트가 확정되면 당장 신흥국 시장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7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분쟁으로 신흥 시장에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피치는 "이미 유가는 지난해 12월 기준치를 웃돌고 있고 추가 가격 상승 위험도 높다"며 "유럽 신흥국에서는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끊기면 공장 폐쇄나 GDP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주요 곡물 수출국이기 때문에 농산물 가격도 예상보다 높아질 수 있다"며 "이처럼 에너지와 식품은 선진국보다 신흥국 가계 지출에서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신흥국은 인플레이션 압력에 더 취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미 신용부도스와프(CDS) 시장에서는 신흥국들의 국채 부도 위험 또한 높게 나타나고 있다. CDS는 부도가 발생하여 채권이나 대출 원리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에 대비한 신용파생상품이다. 이 수치가 높게 나타날수록 국가 부도 위험도 높아진다. 지난 7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터키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의 CDS는 직전 영업일이었던 4일 대비 각각 17bps, 4bps, 4bps씩 상승한 677bps, 244bps, 64bps를 기록했다.
이와 관련해 이승훈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러시아의 디폴트가 현실화 될 경우 최근 국채금리가 급등하고 통화가치가 급락한 국가인 브라질, 칠레, 폴란드, 터키 등 국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구조적 경상흑자국인 한국과 중국, 태국 등은 이러한 논란에서 자유롭다"고 밝혔다.
심지어 러시아는 지난 1998년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해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 전력도 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원자재 수출에 타격을 입은 러시아는 1998년 8월부터 3개월간 외채 상환을 중단했다. 이 결정에 따라 미국의 헤지펀드이자 러시아 국채를 대거 사들였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파산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당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직전 고점 대비 24% 폭락하는 등 자본시장의 충격으로 이어졌다.
모라토리엄과 디폴트의 무게감도 다르다. 모라토리엄은 갚아야 할 돈이 많아 일시적으로 갚지 못하니 부채 상환 시점을 연기해달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디폴트는 '돈을 못 갚겠다'는 선언이다.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과는 다른 점
하지만 1998년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어 모라토리엄(지급 유예)을 선언했던 당시와는 달리, 이번엔 돈은 있지만 갚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지난 13일 미국 CBS와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디폴트는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서도 "러시아는 돈은 있지만 접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대준 연구원 역시 "러시아는 1998년에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으나 지금은 돈은 있으나 인위적인 제재로 상환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유가도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당시의 10배를 넘고 현재 경제 펀더멘털도 양호하다"고 말했다.
애초에 러시아가 빌린 돈의 양이 많지 않아, 러시아의 위기가 전 세계 금융위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낮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투자 은행인 JP모건은 러시아 정부의 채무가 작년 말 기준 400억 달러로 적은 편이라고 밝혔다. 실제 아르헨티나는 지난 2020년 660억 달러의 채무를 지고 디폴트를 선언했지만 세계 경제는 이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이 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수준 또한 1.3%에 불과하다.
또한 러시아가 16일 이자를 갚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국가부도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달러화 국채는 갚지 못해도 30일의 유예 기간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디폴트가 최종 결정되는 시점은 다음달 15일이 될 전망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러시아의 디폴트 리스크가 제2의 LTCM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며 "무엇보다 러시아 자산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의 투자 포지션이 크지 않은 데다 리스크를 관리해 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의 디폴트 선언과 사태 장기화가 스태그플레이션 리스크와 겹치는 등 예상하지 못한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