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산하 고흥지역 수군진을 관할했던 사도진에는 첨사가 주재했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 지휘체계는 수군절도사(수사), 첨절제사(첨사), 만호로 이루어졌다. 첨사가 주재한 수군진은 지휘관 위치만큼 중요한 지역이란 의미다. 사도진에 첨사가 주재한 이유가 있었다. 방어와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진은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에 있다. 사도진 마을 뒷산 모습이 뱀머리인 '사두(蛇頭)'처럼 생겼고, 마을 앞 건너편에서 개구리 형상을 한 '와도(蛙島)'를 넘보는 형태처럼 생겼다고 사도(蛇渡)라고 불러 일명 사두(蛇頭)라고도 한다. 고흥에 위치한 3개 수군진 마지막 글자가 모두 섬이란 뜻을 지닌 '도(島)'를 쓰는데 이곳만 건널 '도(渡)'를 쓴다.
사도진이 위치한 영남면 금사리는 여자만으로 진입하는 외적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여자만은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내해로 고흥과 여수를 관할하는 전라좌수영의 중앙에 있는 수로이다.
사도진은 성종 7년 이전부터 설치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사도진이 전라좌수영의 유일한 첨사진이었지만 중종 때 개편되어 방답진이 첨사진으로 설치되면서 좌수영 관할 내 2개의 첨사진이 운영되었다. 하지만 좌수영 관할 내 모든 만호진이 사도진에 편입되어 있어 전라좌수영 다음으로 중요한 수군진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사도진에 얽힌 사연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2월 25일 전투준비태세 점검차 사도진을 초도순시 차 기록한 <난중일기>에는 전투준비에 소홀한 사도진 군사들을 징계한 내용이 나온다.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를 붙잡아 들였으며, 교수(수령 밑에 있는 벼슬아치)는 내어보냈다. 다섯 포구 중에서 방비가 제일 잘못되었는데 도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하지도 못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역풍이 거세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어서 머물러 잤다"
사도진은 첨사진의 위상에 걸맞게 대맹선 1척, 중맹선 4척, 소맹선 2척, 무군소맹선 8척을 보유했다. 이후 전선으로 교체되어 전선 2척, 병선 2척, 사후선 4척을 폐진시까지 유지했다.
사도진성의 축조는 성종 16년(1485년)에 계획되어 성종 22년(1491년)에 완성되었다. 사도진 성벽 둘레는 1400~1800척, 높이 13~15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도진 시설물들을 기록한 <호남읍지>에는 동문1칸, 서문 1칸, 남문 1칸, 객사 4칸, 동헌 3칸, 아사 7칸, 군기고 6칸, 군향고 5칸, 우물 2개소, 일선창 4칸, 이선창 3칸이 있었던 것으로 나와있다.
사도진은 북쪽벽 중에서도 일부 구간에서만 잔존 석렬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37년경 큰 불이나 마을 대부분이 불타 재건되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유물들이 사라져 버렸다.
사도진 굴강은 매립이 되어 현재는 주차장으로 사용 중인 광장이 예전의 굴강 위치였다고 전해진다. 수군진 관련 비석은 1기, 귀부는 2기가 남아있는 데 현재 마을 복지회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사도진은 폐진과 화재로 대부분 유물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웃지 못할 아이러니한 일이 생겼다. 유물이나 유적은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가치가 빛난다. 그런데 사도진에 있었던 객사 한 동은 1937년 화재에도 건재하였으나 점암면으로 옮겼다가 현재 발포진으로 옮겨져 유물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마을 이장으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떠나려는 찰나에 옆에 있던 청년 한 분이 "이 마을은 굴이 가장 유명하다"며 자랑을 했다. 사도마을은 굴의 주산지이고 고흥 굴로 젓을 담은 '진석화젓'은 예로부터 임금한테 진상한 음식으로 독특한 굴향기와 함께 고소한 풍미를 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