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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했던 홍매가 속절없이 진다. 숨어있던 꽃들은 겨울 추위를 이기고 새싹을 내밀던 노루귀, 복수초도 오는 계절을 막지 못하고 자신의 시간을 더 잡지 못한다. 옛 시인은 연연세세화상사(年年歲歲花相似) 세세년년인부동(歲歲年年人不同)이라고 인생무상을 노래했는데, 그 시에는 짧은 시간 숨죽여 작은 미소를 남기고 속절없이 사라지는 꽃들의 무상함도 담겨 있어 여운이 길다.
  
워러노이 일명 스노우드립이라고 수선화의 일종인데 꽃이 아주 작다.
워러노이일명 스노우드립이라고 수선화의 일종인데 꽃이 아주 작다. ⓒ 홍광석
 
 
실라                        수선화의 일종으로 워러노이처럼 꽃은 매우 작다.
접사렌즈로 잡은 사진이다.
실라 수선화의 일종으로 워러노이처럼 꽃은 매우 작다. 접사렌즈로 잡은 사진이다. ⓒ 홍광석
 
22일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낮이 길어진들 인생이 길어지지 않고 밤이 짧아진다고 꽃들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반가운 까닭은 더 많은 꽃을 만날 수 있으라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리라.

설중화(雪中花)혹은 수선화(水仙花)가 봄 길을 밝히는 계절이다. 여러 시인이 수선화를 아끼고 예찬하는 뜻깊은 시를 남기고 어떤 가인은 아름다운 노래로 감동을 남겼다. 꽃을 보고도 시를 지을 수 없고 노래할 소리도 없는 평범한 사람은 두어 편의 시구를 새기며 수선화 길을 걷는다.
  
노란 수선화 무리지어 핀 꽃은 봄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노란 수선화무리지어 핀 꽃은 봄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 홍광석
 
먼 나라 시인 황정견은 '淤泥解作白蓮藕(어니해작백연우) 진흙탕에서 백련이 솟아나고 ​糞壤能開黃玉花(분양능개황옥화) 더러운 흙에서 수선화는 피어난다'라고 했다.
실제 수선화는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토양의 성분에도 영향을 덜 받는데, 아마 시인은 그런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으로 공감한다.

사실 지난 세월 내가 지켜본 수선화는 꽃을 피우는 시기는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흙에서도 잘 적응하는 식물이었다. 그리고 번식력도 뛰어나다. 생명력이 강한 식물임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보니 황정견 시인은 '可惜國香天不管(가석국향천불간) 아까운 미인을 하늘도 알아보지 못하고, 隨緣流落小民家(수련유락소민가) 인연이 없어 타향의 민가에서 떠도는구나'라고 한탄했을 것이다.
  
하얀 수선화 하나의 꽃대에 여러 송이의 꽃이 달리며 향이 짙은 편이다.
하얀 수선화하나의 꽃대에 여러 송이의 꽃이 달리며 향이 짙은 편이다. ⓒ 홍광석
 
한 점의 겨울 마음 송이송이 둥글어라 / 一點冬心朶朶圓 (일점동심타타원)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은 차갑고도 빼어났네. / 品於幽澹冷雋邊 (품어유담냉준변)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뜨락을 못 면했는데 / 梅高猶未離庭砌 (매고유미이정체)
맑은 물에 해탈한 신선을 정말 보는구나. / 淸水眞看解脫仙 (청수진간해탈선) 


인터넷을 뒤적이다 수선화를 아주 좋아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종자를 구하고자 했다는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만났다. 위의 시가 제주도 귀양살이 중 우리 토종 수선화를 발견하고 남겼던 작품이라는 증거는 없으나, 애지중지하였다는 일화와 함께 기억하고 싶어 소개한다.

제주도가 원산지인 향수선화는 이름 그대로 향기가 짙다. 하나의 꽃대에 두세 송이의 꽃을 선보이며 또 꽃이 오래 가는 귀한 식물이기에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겨울이 추운 지역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가까이 하려면 묘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로사의 정원에는 키가 작지만 다른 수선화에 비해 일찍 피면서 꽃이 똘망똘망하한, 일명 '떼떼수선화'가 한창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노란 수선화는 이제 피기 시작하고 있다. 일경다화(一莖多花), 즉 하나의 꽃대에 서너 송이의 꽃이 피는 하얀색 수선화도 곧 뒤를 이을 것이다.

어린 싹이 아직 얼어 있는, 자신의 몸무게보다 수십 배 무거운 흙을 박차고 나오는 수선화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기적의 한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리지어 피는 수선화에서 봄 길을 밝히는 황금색 등불을 보았다. 세심한 관찰은 마음의 여유 없이 안 되는 일이고, 관찰은 의문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기초라고 하지만 수선화를 보면 "그냥 좋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애기 수선화  일명 떼떼수선화라고 하는데 일찍 피는 수선화다.
애기 수선화 일명 떼떼수선화라고 하는데 일찍 피는 수선화다. ⓒ 홍광석
 
정신적 안정이라는 심리 치유로 웃음 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 숲치료, 원예치료 등이 알려졌기에 나 역시 관심은 가졌으나 효과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암 수술을 받고 긴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겪었던 나는 이제 꽃을 통한 원예 치료의 효험을 믿는다.

그 꽃의 중심에 봄날의 수선화가 있음을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혹시 나에게 나르시즘 혹은 자기애(自己愛)에 빠진 것 아니냐며 놀리는 사람이 있어도 화를 내지는 않을 듯하다. 봄볕이 따사로운 날에 나의 봄을 시샘하는 망령들은 빼고 가까운 지인을 불러 내 마음을 전하고, 수선화 한 뿌리쯤 나누고 싶다. 우선 주민과 소통을 위해 낮이면 대문을 활짝 열어두겠다는 결단(?)을 해야겠다.

#수선화#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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