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로부터 정유재란(1597~1598) 당시 순천왜교성 전투를 그린 '임진정왜도(壬辰征倭圖)' 자료집(1999)을 구했다. '임진정왜도'는 '임진왜란 때 일본을 정벌한 그림'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순천왜성을 중심으로 연합군(조선군-명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 상황 뿐만 아니라 노량해전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화가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정황상 명나라를 따라왔던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루마리로 된 그림의 길이는 6.5m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을 소재로 한 것 중에 유일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내용이 중국인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이나 거북선은 등장하지 않아 아쉽다.
'임진정왜도'가 빛을 보게 된 경위는 흥미롭다. 오래전 미국의 한 교수가 미국에 사는 중국 태생 시민으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평가를 요청받았다. 그 교수는 이렇게 얻어볼 수 있었던 그림을 한 세트의 사진들로 찍었는데 대부분은 흑백사진이었고 몇 부분만 컬러사진으로 찍었다. 그림은 중개인을 통해 홍콩에 살고있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팔려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1968년경 미국 컬럼비아 대학 한국학 교수인 게리레드야드 교수가 다른 미국 교수에게서 흑백사진을 부분적으로 찍은 사진 한 세트를 보관하고 있던 것을 1998년 11월 순천시 전통문화보존회에서 조순승 전 국회의원을 통해 교섭해 필름 11장을 입수했다.
순천왜교성 전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이 1598년 8월에 급사했다는 전보를 듣고 철군을 서둘렀던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군과 조명연합군간에 3개월 동안 벌어진 최대 최후의 격전을 펼친 전투다.
당시 전쟁에 참전한 조선과 명나라의 지휘부를 보면 육상군은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의 제독인 유정, 해상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의 도독인 진린으로 왜교성에서 요새를 구축했던 왜군 장수는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임진정왜도'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저술가들이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저술을 했었지만 그림으로써 보여준 것은 전혀 없었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던 거북선을 그렸다고 하는 그림들도 훨씬 뒤에 그려진 것이다. 대부분 전쟁이 끝난 지 200년 후에 그려진 것들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해전인 노량해전을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이 발견된 것은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전투도 속에 거북선은 한 척도 등장하지 않지만 생생한 전투 장면과 놀랄만한 화필은 당시의 정황과 전장의 긴박함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한다.
'임진정왜도'를 그린 화가의 이름은 미상이다. 그러나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의 목격자인 것이 확실하고, 정유재란 당시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온 명나라 장군들 중 한 장군의 참모부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은 조선인이 아닌 명나라 사람이 그렸기 때문에 조선의 병사와 선박들은 비록 그림속에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지식 없이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그려진 길이 6.5m 두루마리 그림에 나오는 장면들은 시간상으로는 정유재란이 끝나기 전 약 3개월, 거리상으로는 약 30km를 포괄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약 4400명이다. 왜군이 약 2070명(884명은 시체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이고 2330명가량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다. 바다를 메우고 있는 205척의 배 가운데 136척은 명과 조선측 선박이고 99척이 왜선박이다. 왜선박 가운데 53척은 바다에 떠있고 46척은 불길에 휩싸였거나 침몰당하고 있다. 연합군 선박은 한 척도 불붙거나 침몰당하지 않아 역사적 사실과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육지에는 나무 184그루, 건물 196채, 487개의 깃발이 점점이 산재돼 있다. 사용된 무기로는 대포 75문, 조총 322정이 있고 무수한 창검과 활, 화살이 그려져 있다.
태극기의 원형으로 보이는 조선수군기 모습? 놀랍다
기대했던 거북선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로 놀랄만한 그림이 있다. 조선수군의 배로 추정되는 배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한국이 최초로 근대적인 국제관계에 들어서면서 한국을 나타낼 국기가 필요해 1882년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정왜도'를 통해 거의 300년 전에 그려진 그림 속에 태극기의 선구적 원형이 담겨 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더구나 태극기의 출현은 중국 선박이나 일본 선박으로부터 조선 선박임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국가의 상징이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순천왜교성을 공격하고 있는 전함 가운데는 맨 앞에 특이한 깃발을 단 두 척의 전함이 있다. 한 척은 '천병(天兵)'이라는 깃발을 달고 있어 당시 조선에 출정한 중국 군인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한 척은 태극기와 유사하다.
그림에 보이는 증거로 보아 한국인들은 매우 오래전부터 태극을 국가적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 깃발에는 태극말고도 네 귀퉁이에 꽃무늬 같기도 하고 새 무늬 같기도 한 것이 배열돼 있다. 이 네 귀퉁이에 그려진 무늬가 가운데 태극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네 귀퉁이의 괘와 일치한다. 화가는 '천병'기와 '태극'기로써 중국 선박과 조선 선박을 구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두 배에 타고 있는 수군의 제복으로도 구분된다. 명나라수군들은 술이 달린 투구를 썼고 조선수군들은 현대 소방관의 헬멧과도 같은 밋밋한 투구를 쓰고 있다.
태극기의 기원은 1882년 대일 수교사절단의 사신들이 창안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이 사용한 깃발을 유추해보면 태극기의 기원이 조선수군기에서 유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진정왜도'는 정유재란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