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와 대동아 공영권을 향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을 집어삼킨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은 도쿄에서 멀지 않은 토치기현에 위치한 아시오 구리 광산에 대규모 채굴시스템을 갖추고 개발을 본격화했다. 그 과정에서 혹독한 노동 착취와 함께 자연에 대한 착취가 일어났다.
광산 인근에 건설된 제련소에서 배출된 황산화물 등 유독가스와 잔여물이 커다란 오염원이 되어 울창하던 숲이 파괴되고, 물고기들이 폐사했다. 와타라세가와 유역에 대홍수가 발생해 비옥하던 평야는 독토(毒土)로 변하고, 주민들에게는 심각한 광독(鉱毒) 피해가 발생했다. 바로 1890년경 발생한 아시오 광독 사건이다.
사고의 원인, 정부와 가해 기업의 책임, 피해 규모 및 정도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공개, 재발방지 대책 수립, 피해 배상 등은 없었다, 책임 부인, 회피, 거짓말, 피해 축소, 공권력을 동원한 피해자 탄압 등만 자행되었다.
일본질소비료회사가 수십 년 동안 미나마타 만(灣)에 방류한 유기수은으로 발생한 끔찍한 병인 미나마타병과 전대미문의 핵사고인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에서도 되풀이된 행태이다.
이런 일본 정부의 태도는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과 같은 전쟁, 식민지배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에도 이르고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의 오리발 내밀기로 아직 이들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형형이다.
이처럼 국가와 기업의 생태계 파괴, 공동체 와해, 인명 피해에 대한 책임 회피는 비단 일본에서만 목격되는 것도, 과거 한 때의 일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모두 부국강병과 경제성장을 위해 자연을 대상화하고 착취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부수적 피해'로 치부하는 근대 산업문명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근대문명의 어둠에 사력을 다해 항거한 의인
일본 근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다나카 쇼조(1841~1913)는 아시오 광독 사건의 평생 저항했다.
다나카 쇼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인 고마쓰 히로시는 후쿠시마 핵사고의 충격 속에서 일본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그리는데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나카 쇼조의 삶과 사상을 알리는 책 <참된 문명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고>를 썼다. 옮긴이 오니시 히데나오 역시 다나카 쇼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녹색평론 발행인 고 김종철 선생은 <대지의 상상력>과 이 책의 추천사에서 "다나카 쇼조가 일본이 근대화, 공업화를 향해 매진하기 시작하던 메이지 시대에 이미 그 근대화라는 것이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민의 삶을 뿌리부터 망가뜨리는 반생명적인 폭력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명확히 꿰뚫어 보고 거기에 사력을 다해 항거한 '의인'이었다"고 했다.
쇼조는 작은 마을의 관리를 거쳐 1890년 제1회 중의원으로 당선된 후 1901년 스스로 사퇴할 때까지 내리 6선을 했고, 중의원 시절에 아시오 광독 사건의 해결을 위해 매진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피해자를 탄압했다. 쇼죠는 의원직을 던지고 마을로 들어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투쟁하다 1901년 12월 10일 메이지 덴노(천황, 天皇)에게 '직접 상소'(직소)를 했다.
직소는 공식적 중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천황에게 직접 상소하는 것으로, 하극상으로 간주되어 내용이 합당한 경우에도 직소를 올린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전통이 있었다.
쇼죠는 직소를 실행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고 유서를 작성해두는 등 죽음을 각오했지만, 전직 의원이라는 신분과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이 참작되어 처벌은 면했다.
직소로 광독 사건에 대한 여론이 달아오르자 정부는 광산 아랫마을을 수용해 거대한 유수지를 만들겠다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즉, 마을을 수몰시키려는 뜻이었다. 쇼조는 마을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현실에서도 남은 19가구 주민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생애를 마쳤다.
광독 피해를 입은 지역의 의원 수십 명이 있었음에도 쇼조처럼 끝까지 치열하게 광독 문제에 매달린 사람은 없었다. 왜 쇼조는 마을의 '자잘한 일(小事)'말고 나라의 '큰일(大事)'에 힘쓰라는 다른 의원들의 충고도 물리치며 광독 문제에 평생을 바쳤을까?
저자는 첫째, 쇼조가 광독 사건의 본질이 '물질 중심, 과학기술 만능, 이익 지상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문명이 당연스레 빚어낸 생명 경시'임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광독 문제를 자기 삶의 방식이나 양심, 자신의 존재를 따져 묻는 문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태일 열사와 그의 어머니 이소선,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길 위의 사제 문정현 신부처럼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깨부수기 위해 변치 않는 싸움을 이어가는 분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수긍되는 설명이다.
시민운동, 환경운동, 근대문명 비판의 선구자
쇼조는 일본이 대만에 이어 1910년 조선을 병탄해 대국이라는 기분에 도취한 분위기에서도 "슬퍼라, 우리 일본, 바야흐로 망국이 되었구나"라며 망국을 슬퍼했고, 부국강병이 아닌 소국을 추구했다.
일본의 정치에 대해서도 "지금 정치가들이 몹시 바쁜 것은 정권 싸움에 취한 자가 많기 때문"이고, 헌법을 향해 "근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더구나 민간의 실정이나 국민들의 기쁨과 걱정 사이로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지금의 우리 정치인들에게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6선 의원 출신인 쇼조는 마을로 들어가서도 마을사람들을 이끌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풀뿌리 민중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존중했다. 마을 자치, 일본 민중 사상 속에서 끊이지 않고 흘러 온 자연과 하나된 삶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그가 남긴 글들을 보자.
"너절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몸을 누이면서, 그 인민의 고통에서 배워야 구원이라는 사상이 마땅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랴", "인민은 인민의 경험을 믿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라"
쇼조는 근대화의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직시하고, 근대화의 희생자가 된 이들을 끊임없이 염려하고 구하고자 마음 쓰며 살았다. 그는 시민운동, 시민불복종, 환경운동, 주민자치운동, 근대문명 비판의 선구자로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의인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책 제목은 쇼조의 다음 글에서 나온 것이다.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한다."
[영상] 류변의 서재 7회 보기 https://youtu.be/AA7bghs9p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