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모임이 있어 서울에 가게 되면 동창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시어머니였다. 모임이 끝나 지하철을 타고 시어머니가 사는 인천에 도착하면 시간은 늘 자정을 향해 있었다.
"우리 며느리는 서울에 오면, 내가 혼자 있다고 늘 나한테 와서 자고 가요."
언제부턴가 주변에 자랑하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무리 시간이 늦더라도 시댁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엔 확신이 있었다. 명절에 올라와도 친정에서는 식사 한 끼 정도만 하고 시댁에서 며칠을 자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그 말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7년의 세월을 혼자 지내셨다. 70대 중반, 고관절 수술을 하셨는데 수술이 큰 효과가 없었는지 다리와 허리의 통증을 계속 호소하셨고 한의원을 경로당만큼이나 자주 다니셨다. 수술을 하고 회복 차 우리 집에서 한 달 머문 것이 어머니가 그렇게 원하던 함께 살기의 기간이었다.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어머니는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다리가 아파서 보통 일이 아니다, 혼자 있어 쓸쓸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표현의 줄임말이었다. "밥맛이 없어서 보통 일이 아니다"로 이어지는 매일의 전화통화도 내게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혼자 사는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끼기에는 역부족인 나이였던지라 어머니의 보통을 넘어서는 그 결핍에 적절한 위로를 하기보다는 턱도 없는 훈계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반려견을 키워보세요"라고도 했고 감정이 엇나갈 때는 "아범이 늘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니 보통일이 아니에요"라는 협박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지방에 살고 있기에, 아이들 양육이 벅차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장차 손주며느리까지 한집에 살고 싶어 하는 시어머니에게 "아이들 다 자라서 출가하면 그때 함께 사시게요"라는 말로 어머니의 희망사항을 미뤘다. 어머니가 유난스레 외로움을 호소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우리 부부는 한 달 뒤에 있을 일본 여행 사전모임을 하고 있었다. 매일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던 나는 유사시를 대비해 해외 여행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때마침 주변의 권유로 비교적 가까운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저녁, 몇 차례의 안부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가까운 곳에 사는 동서에게 찾아가 볼 것을 권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계속 통화가 되지 않고,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어 119를 대동하고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거실에 편안히 누워계셨다고 한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는 냄비의 물이 다 졸아들고 작은 가스 불이 아직도 열을 내고 있는 저녁 시간에 어머니는 발견됐다. 샤워를 마치시고 잠깐 쉬시기 위해 누워 계셨던 모습이었다. 마치 임종 준비라도 한 듯 깨끗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머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돌아가시기 2주 전, 동창모임을 위해 상경한 때였다. 그날도 늘 그러시듯, 한의원에 가기 전에 샤워를 하셨다. 한의원에 모셔다 드리고 나오는 길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던 그 눈길이 지금도 생생하다. 눈길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어머니를 팽개치고 나오는 듯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그날도 한의원에 가기 위해 샤워를 하고 거실에 잠시 누워 쉬시다가 천국에 계신 아버님께로 갔다. 향년 83세이셨다. 아버님과 같은 연세에, 같은 5월에 하늘로 가셨다. 돌아가신 시간에 우리 부부는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에 어머님의 죽음과 우리의 삶은 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혼자 사는 것의 외로움을 이제 알겠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 부부는 한의원을 찾아가 보았다. 젊은 한의사는 어머니를 정확히 기억했고 '외로우니 한 번 놀러오라'고 했다던 어머니의 말을 전해 주었다. 맘씨 좋은 할머니로 생각하고 다정하게 대해줬을 한의사에게 고마웠다. 어머니를 막내라고 불렀던 경로당에서는 건강하던 어머니의 임종 소식에 놀라워했다. 주무시다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부럽다는 분도 계셨다.
정신없이 상을 치르고 어머니의 집에서 사진을 챙겨왔다. 어린 남편을 안고 있는 한복 차림의 젊은 시어머니. 두 아들과 물놀이를 즐기는 반바지 차림의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환갑 여행 중인 원피스 차림의 시어머니. 이제 나는 환갑 여행 중인 사진 속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다 독립하고 환갑의 나이가 되고 보니 혼자 산다는 것의 어려움이 어떠할지 조금씩 생각하게 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극한 외로움을 겪을 시간으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어머니의 기일에 어머니 묘지에 다녀왔다. 어머니가 묻혀 계시는 성환 천주교 묘지엔 생전 어머니가 준비해 놓으신 두 아들과 며느리의 묘지도 함께 나란히 붙어 있다. 아들 내외와 손주들과 함께 살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기대와 외로움이 다시 느껴졌다. 묘지에 올 때는 당신이 좋아하던 과일을 꼭 가져오라던 당부 말씀대로 과일을 올리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머물렀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렇게 사랑하던 큰손주가 아들을 둘이나 둔 엄마가 되었어요."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외로움을 겪어내신 어머니의 묘소에서 이제 외로움을 알아가는 며느리가 늦은 효도의 마음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