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2명, 6.1 지방선거가 배출한 당선인 수입니다. <오마이뉴스>는 그중 눈길이 가는 지역 일꾼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
개표 결과는 반전이었다. 여러모로 불리했던 후보가 지난 6.1 지방선거에서 최다 득표로 충북 옥천군의원이 됐다. 송윤섭(다선거구, 진보당) 당선인의 이야기다. 그의 득표율은 28.16%(1543표), 옥천군의회 선거구 전체에서 가장 높다.
군의원 선거 첫 도전인 그는 당선조차 불투명한 후보였다. 의원 2명을 뽑는 옥천군 다선거구는 여전히 지역색과 보수성이 강한 농촌 면 지역으로 구성됐다. 후보는 총 5명이었다. 현역 의원이 있는 안내면과 청성면에서 3명, 유권자 수가 가장 많은 청산면에서 1명, 반대로 표가 제일 적은 안남면에서 송 당선인 1명이 나왔다. 여전히 '우리 면 사람 찍어준다'는 표심이 강해 그가 다른 동네의 표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안남면 상황도 유리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북 정읍 출신이었다. 처음엔 주민들은 '토박이'가 아니라서 안 찍어준다고 했다. 여당·보수 후보를 선호하는 정당 쏠림 현상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니 진보당의 송 당선인이 여러 면에서 고르게 선전해 1위에 올랐다. 안남면도 그를 확실히 밀어줬다.
송윤섭이란 인물의 기초의회 진출은 지역사회에 던지는 의미와 파장이 크다. 지연과 혈연을 타파하고 정책과 지향, 사람으로 승부해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지나온 삶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농민, 이장, 교장
송 당선인은 서울대 원예학과(현 조경학, 83학번) 졸업 후 1년간 농민단체 간사로 일하다가 1989년 연고도 없는 충북 옥천에 농사 지으러 왔다. 아예 서울 집을 정리한 뒤 부모님을 모시고 귀농했다. 1992년 10월에는 같은 농민회 회원인 원영순(26, 당시 청산면 대성리)씨와 백년가약을 맺고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지역에 온전히 뿌리를 내렸다.
1994년 11월 5일자 <옥천신문>에 실린 '젊은 영농후계자 송윤섭' 인터뷰 기사 내용을 보자.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녀석이 마을에 들어와 괜히 풍파나 만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주변 주민들의 반응이 냉담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는 빈집에 들어가 살며 일손이 필요한 집에서 열심히 품을 팔았다. 1년 내내 들판에서 주민들의 얼굴을 익히며 사람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는 고추씨 공동구매사업, 고추판매사업, 대학생 농촌활동 등 농민 피부에 와 닿는 농민회 사업을 진행하며 주민과 친해졌다.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해 마을 농민들이 공동생산·공동판매 등 대응을 할 수 있도록 고추 작목반 조직을 구성한 것은 물론, 면내에 '한우리'라는 과채류 작목반을 만들기도 했다.
기자가 옥천신문사에 입사한 2002년, '새내기 농부 송윤섭'은 어느덧 새내기 이장이 돼 있었다. 그의 진심과 노력이 13년 만에 통한 것이다. 이후에도 송 당선인은 쌀 수입개방 반대, 유통망 개선 요구 등 그가 믿는 농촌과 농업의 모습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가 '착하고 성실하다'며 믿고 따랐다.
송 당선인의 또 다른 주요 이력은 '안남어머니학교 교장'이다.
그는 글 모르는 지역 어르신이 보은까지 버스를 몇 번 갈아타며 한글 공부를 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학교를 직접 만들었다. 같이 도모했던 공판장 주인, 목사, 농민 등이 교사를 자청했고 함께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며 준비했다. 한글학교가 아닌 어머니학교라고 이름 지은 이유가 있다. 글 모르는 것을 괜히 알려 어르신들에게 창피를 주지 않을까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2003년 2월 28일 안남어머니학교가 개교했다. 송 당선인 등이 안남면 12개 마을을 계속 돌며 홍보한 결과 안남초등학교 학생 수를 능가하는 80여 명의 할머니 학생이 모였다. 농촌의 다수인 '어머니'들은 소수자였다. 모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해 목소리조차 제대로 못 냈다. 송 당선인은 그들이 목소리를 찾도록 토대를 만들었다. 무려 20년 넘게 주임교사와 교장으로 재직하며 어머니학교를 챙겼다.
안남어머니학교는 보통의 복지관 한글교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혜성 복지가 아니었다. 학생회나 교사회 구성을 돕는 식으로 자치 문화를 만들어갔다. 소풍도 가고 학예회도 열었다. 각자 사연이 많았던 할머니들은 늘그막에 반갑게 해후했고 학교를 다니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방학과 졸업을 싫어하는 학생을 본 적이 있는가. 안남어머니학교를 지켜보면서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 제대로 된 복지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됐다. 학교 가기가 즐겁고, 서로 돕는 게 행복한 삶이 바로 우리가 바라던 것 아니었나.
마을을 위하는 사람
또 송 당선인은 마을 주민자치를 살리려 노력해왔다. 그는 2006년 말 마을과 집집마다 분배되던 금강수계기금 주민지원사업 예산의 30% 가량을 안남면 공동사업으로 진행하도록 합의를 이끌어냈다. 당시 12개 마을 이장들이 합의하면서 지역 최초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1억5천만 원 정도의 지역 공공기금이 형성됐고, 이를 논의하는 지역발전위원회가 꾸려졌다.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해 공공기금을 만들었다는 것, 관에 의존하지 않고 약 40명에 가까운 규모의 논의기구를 스스로 꾸렸다는 것은 주민참여예산제와 주민자치 역사에 길이 남을 사료다.
더불어 송 당선인은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공모 재수 끝에 50억 원 남짓한 돈을 끌어왔다. 이 예산으로 지역의 싱싱한 농산물이 오가는 배바우장터를 복원했고, 배바우마을신문를 만들었다. 배바우도농교류센터도 세웠다. 공동체 교육이나 활동, 숙박 등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송 당선인은 12개 마을을 찾아다니며 사전 설명에 공들이고, 잔치를 열어 많은 사람이 찾아오도록한 결과, 어느덧 센터는 안남면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밖에 2000년대 초반에는 농민들이 직접 지역 농정에 참여하는 농업발전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시위에 동참했고, 농업발전위원회 조례가 옥천군에서 만들어지는 데 힘을 보탰다. 옥천군 학교급식조례 제정에도 목소리를 냈고, 학교 급식 직접 실행 주체인 옥천살림영농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초창기 멤버로 활약을 했다. 이밖에 안남배바우작은도서관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옥천희망연대란 시민단체를 만들 때도 앞장섰다.
유권자는 다 알고 있다
30년 넘게 농민과 농업, 주민자치에 헌신해온 그는 왜 직업 정치인으로 변신했을까.
지난해 옥천군은 송 당선인이 사는 덕실마을(도덕2리)에 태양광 발전이 들어서도록 허가했다. 주민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산사태 위험과 공사 중 대형 차량 진입 등에 위협을 느낀 마을사람들은 군청 앞마당에 텐트를 쳤다. 덕실마을 이장인 송 당선인은 주민들과 함께 끝까지 싸웠고, 허가 취소를 쟁취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치가 잘못되면 얼마든지 내 삶터에 당장 위험이 닥칠 수 있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이유다. 그간의 맥락과 여정은 유권자들이 그의 출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고, 그렇게 그는 큰 의미를 갖고 선택받았다.
송 당선인의 공약도 그의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농민수당 120만 원, 마을 순환 저상버스 운행, 면 먹거리 복지센터에서 어르신 공공급식 실시, 치과버스 순회 운영으로 정기검진, 주거 환경팀 신설로 주거 복지 보장 등. 하나같이 농민의 삶과 연계된 공약이다.
이밖에 농민기본권 보장 강화, 온생애 통합돌봄체계 구축, 공공일자리로 면 단위 정착 청년 육성, 먹거리 복지체계와 공적보건의료체계 구축 등도 약속했다. 그의 공약에선 개발과 토건 계획을 찾아볼 수 없다.
옥천에서도 가장 소외된 안내·안남·청산·청성면에서 군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수 있을까. 옥천군의원 8명 중 한 명으로서 인구소멸지역으로 낙인찍힌 옥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변방에서 시작된 변화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