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다. 잠시 동안 눈에 띄었다가 이내 다시 사라지는… 마치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처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쌓여진 불안과 두려움은 어느 순간 그 실체의 형태가 모호해진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왜 아직도 불안해하는지 자신 스스로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Süddeutsche Zeitung)이 올해 주목할만한 뮌헨의 신예 예술가 6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이민재(37)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독일의 남부 도시 뮌헨은 지금 그의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에 매혹당했다. 수많은 미술작가에게 팬데믹은 가혹했지만 마치 그만은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이민재 작가는 지난 10일 폐막한 전시회 '퍼스펙티브스'에서 레아 바이다 작가와 '올해의 젊은 작가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 미술상은 뮌헨 기반 신진작가를 대상으로 수여하는 상으로 예술가협회인 쿤스트클럽13과 뮌헨시 미술지원단체 플랫폼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2020년에는 아시아 출신 미대생으로는 최초로 제50회 막스 에른스트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막스 에른스트상은 독일 미대생들이 지원할 수 있는 장학금 중 가장 큰 금액인데,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창시했던 독일의 예술가(화가/조각가/시인) 막스 에른스트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그의 고향 브륄시에서 시상식을 개최해오고 있다. 이 작가는 이외에도 2021년 라인란트팔츠재단에서 수여하는 에던코벤시 장학금을 포함 다수의 상을 받았다.
추계예대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이민재 작가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뮌헨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현재 거주하는 뮌헨 이외에도 함부르크, 마르부르크, 잘츠부르크, 데민, 브륄등에서 설치와 퍼포먼스 등을 통해 왕성한 전시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주제는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 중 하나인 앙스트(Angst, 불안이나 공포)다. 그의 작업은 이런 인간의 불안, 두려움, 공포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로 빛, 소리, 비디오 그리고 공간설치 등 다양한 예술적 매개를 통해 보여지며, 작가 자신의 신체도 그 작업의 소재로써 활용된다.
이민재 작가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설치작업은 <
가장 좁은 복도>(Engster Korridor)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독일에서 다수 전시되었고 미술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가장 좁은 복도> 퍼포먼스에서 이 작가는 직접 제작한 길이 6미터와 폭 27cm로 된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며 벽에 분필로 '두려워하지 마라'는 텍스트를 적는다. 하지만 그가 좁은 공간을 몸을 비집으며 지나는 동안 이 글자들은 어느새 못 알아보게 되어버린다.
호기심 어린 관객들은 14개의 작은 구멍을 통해 그의 퍼포먼스를 엿보는 가운데 충격적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전시회 한구석에는 그의 퍼포먼스를 실시간으로 기록 중인 TV화면이 나란히 옆에 있다.
또한 2020년부터 현재까지 주목을 받는 작업 <
두려움 이후는 두려움 이전과 같다>('Nach der Angst ist vor der Angst')에서 이 작가는 '숨'을 모티브로 색다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뮌헨시청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그는 유리창 너머에서 마스크를 쓴 관객을 항해 끊임없이 숨을 내쉬고, 그에 따라 유리창에 '앙스트'라는 글자가 나타나는 퍼포먼스로 관객과 소통하기도 했다.
이민재 작가는 앙스트를 테마로 선택한 이유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사전에 '독일인의 앙스트'(German Angst)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듯이, 독일에서 앙스트라는 단어는 불안 이외에도 두려움, 공포 등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다. 그래서 평론가나 관객들이 내 작업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모습이 흥미롭다"며 "외국에서 유학생으로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강렬했던 것 같고 이런 개인적인 느낌을 보편적인 주제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표현하는 '앙스트'는 단지 개인적인 불안이나 두려움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가는 "코로나19 이전에도 불안에 대해 작업을 해왔는데 팬데믹을 경유하면서 누구나 공통적인 앙스트, 즉 타인의 '불결한 호흡'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며 "이런 사회적 배경이 제 작업에 대한 관심을 높인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퍼스펙티브스' 시상식에서 심사위원들은 "이민재는 그의 예술작업으로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회를 인상 깊게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가의 주제는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가 이어진 지난 2년간 더 유의미하게 다가온다"며 "우리가 현재 직면한 위기들이 초래한 시대 분위기에 적합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다수의 미술 평론가들도 같은 평가를 했다. 요흔 마이스터도 "우리 시대의 긴급한 문제에 대한 인상적인 작업"이라고 분석했고, 수잔네 헤르만스키도 <쥐트도이체 차이퉁>에서 이 작가의 예술세계는 "항상 사적이면서 사회적인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고 전했다.
그의 퍼포먼스 작업에 대해 일반 시민 관객들이나 동료 작가들도 이구동성으로 깊이 있는 작업이라는 호평을 하곤 한다. 불안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친밀하고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느낌인데다가 이 작가의 퍼포먼스는 그 형식면에서도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서인 듯 보인다. 도로테아 폰 키에드로프스키 비평가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이민재의 작업은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의 기본적인 공포 경험을 관능적이고 미학적인 방식으로 접하게 한다"고.
이민재 작가의 퍼포먼스는 우리를 안락함에서 벗어나, 우리 내면의 불안과 실존을 용기 있게 직면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두려움에 대처하는 어떤 해답도 제시하진 않는다.
"너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민재 작가가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분필로 적어나가는 이 문구는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관객에게 하는 말일까. 아니면 암묵적으로 개인의 두려움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려는 사회에게 던지는 말일까. 그의 다음 작업이 벌써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그의 작업은 아래에서 감상할 수 있다.
웹사이트 : http://www.flachware.de/minjae-lee/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minjae.m4h/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minjae.lee.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