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를 들라면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라는 말이 맨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사화와 당쟁은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두 요소라 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당파가 있었고 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은 늘 상존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중기,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반까지 약 50여 년 동안 무려 4번의 큰 사화가 일어나 억울하게 목숨을 잃거나 척박한 유배지의 귀양살이로 날개가 꺾여버린 선비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권력을 지키려는 특권 세력들의 무고와 농단에 맞선 개혁적 진보 성향의 '선비(士)'들이 기득권을 가진 훈구파들에게 '화(禍)'를 당했다 해서 후세 사람들은 이를 '사화(士禍)'라고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 사화로는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가 있다.
파평 윤씨 집안의 권력투쟁, 을사사화
1544년 11월. 연산군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쿠데타를 일으킨 반정 세력들에 의해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조선 11대 왕 중종이 승하했다. 중종의 뒤를 이어 25년간 세자로 지내던 인종이 즉위했지만 그의 건강과 권력 기반은 취약했다.
당시 조정은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두 외척 세력이 격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경기도 파평을 본관으로 한 파평 윤씨들이다.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지칭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윤과 소윤의 당쟁은 치열했다. 대윤파 장경왕후에게는 중종의 맏아들인 원자가 있었고 소윤파 문정왕후에게는 경원대군이 있었다. 둘 중 누가 왕위에 오를 것인가. 조정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 들었다.
경윈대군을 앞세운 소윤파가 공격에 나섰지만 하늘은 먼저 대윤파의 손을 들어줬다. 장경왕후의 아들 이호(李峼)가 먼저 용상에 앉았다. 그가 조선 12대 왕 인종(仁宗)이다. 인종을 등에 업은 대윤은 소윤 윤원형 일당을 철저히 짓밟았다.
복수의 칼을 갈던 소윤파에게 기회가 왔다.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가 인종을 독살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인종이 등극한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11살의 나이로 대권을 잡는다. 그가 조선 13대 왕 명종이다.
궁중의 법도에 따라 왕실의 어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권력의 화신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대윤파의 영수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참형에 처했다. 또한 윤임을 따르던 영·호남의 수많은 신진 사대부들이 화를 입게 된다. 역사는 이 사건을 1545년 을사년에 일어났다 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작정치의 희생양, 금호 임형수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26년 전 1519년 기묘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따르던 최산두·유성춘·윤구 등 기라성 같은 호남 사대부들이 화를 입은데 이어 을사사화 또한 전라도 선비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파평 윤씨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시작된 을사사화는 더욱 크게 번져갔다. 2년 후 1547년 가을.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써붙인 대자보 하나가 발견됐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문정왕후의 섭정과 소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조정에는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대윤파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대윤의 잔당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소윤들의 공작 정치로 중종의 아들, 봉성군(鳳成君)과 참판 송인수 및 이조좌랑 이약해는 사형에 처해지고 임형수, 유희춘, 이언적, 정유침, 이염, 노수신 등이 화를 당했다.
'정미사화'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거나 40여 명의 어진 선비들이 원지로 유배를 떠났다. 이들 중에 34세의 팔팔한 나이에 억울하게 사약을 받고 동백꽃처럼 뚝 떨어진 선비가 있다. 문무를 겸비한 호걸 중의 호걸 임형수가 그 사람이다.
엊그제 베인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지난 8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 내동마을에는 '등림사(登臨祠)'라는 사당을 찾았다. 등림사는 금호 임형수를 주벽으로 하고 조카 송파 임식과 관해 임회를 배향하고 있는 평택 임씨의 사우이다.
금호 임형수(錦湖 林亨秀 1514-1547). 본관은 평택이다. 지금의 전남 나주시 송현동에서 북병사 임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금호(錦湖)'는 영산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18살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22살의 젊은 나이로 대과에 급제하였다. 국왕 중종이 베푼 시회에서 2위를 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고 말을 잘 탔다. 성격 또한 호방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기대를 받았다.
예문관 검열과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설서로 뽑혔다. 홍문관 수찬을 지낸 후, 임금이 덕과 재주가 뛰어난 문신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공부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들어가 당대의 석학 김인후·이황·나세찬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넓혔다.
회령 판관을 거쳐 정 3품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랐지만 1545년 7월 인종이 죽고 명종이 등극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파직당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2년 뒤 1547년 가을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다. 평소 윤원형의 주구 노릇을 하며 임형수의 재주를 시기 질투하던 정언각(1498~1556)의 상소로 금호는 억울하게 벽서 사건에 얽혀 결국 사약을 받는다.
<명종실록>에는 금호가 사약받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약을 마시던 순간 아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했다. 다시 말하기를 "무과일 경우는 응시해도 좋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 했다.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약을 들고 마시려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을사사화 때 화를 당한 인물들의 행적을 모아 엮은 전기 <유분록>에는 "임형수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아니하자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다. 그래도 죽지 않자 목을 졸라 죽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식을 들은 퇴계는 "억울하구려! 너무 억울하구려! 언제쯤 그와 대면하여 학문을 논할 기회가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임형수의 절친이었고 같이 공부했던 하서 김인후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만시(輓詩) 한 편을 남겼다.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런가
져근덧 두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기 버티리
날로 푸르름이 깊어가는 초여름이다. 등림사 뒤편 푸르른 솔밭에는 금호의 억울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락장송들이 호방한 기개로 하늘을 찌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