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집안 일을 소홀히 했다. 날을 잡아 잡초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 새벽과 오후 늦은 시간에 호미와 낫을 들고 잡초와 한판승을 벌였다. 잡초는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금방 뽑히는 약한 존재이지만 씨를 퍼트리고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 그것은 잡초가 살아남기 위해 오랜 세월 야생에 적응한 결과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호미로 땅을 파고 잡초를 뽑아내고 며칠이 지나도 잡초의 싹이 다시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땅은 호미 날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척박했고 흙먼지만 날렸다. 심지어 여기저기서 잡초가 말라죽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땅에 수분이 없어서 잡초의 씨앗이 발아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물었다. 내가 사는 충남 부여에서 비 구경을 못한 지 한 달이 넘었다. 도로에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풀 섶에서 뿌옇게 날리는 흙먼지가 대지에 습기가 부족한 지 오래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천이 바닥을 드러났다
"원판(매우) 가물어서 채전(菜田)에 나무새(채소)들이 좋지 않아서 뜯어 가라고도 못 허겄네. 물외(오이)는 쓰고 상추쌈은 크지를 못 했당게. 맨날 물을 준다고 줬어도 비 한 번 온 것 하고 같으간디..."
시골 마을의 인심은 텃밭에서 나는데 이렇게 가물 때는 박해지기 마련이다. 제대로 비를 맞지 못한 농작물들은 볼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질기고 맛이 없어서 남한테 주기가 미안하다는 뜻이다.
뽑아내고 돌아서면 자라는 잡초와의 전쟁을 치르지 않아서 편하기는 했지만 논과 밭에서 자라는 식량 작물들의 생장이 걱정이었다. 이미 초여름 기온을 보이는 날씨는 한 뼘 땅 속의 습기까지 앗아가 버렸다. 이런 상태에서는 비가 내려도 땅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그대로 흘러버리게 된다.
가뭄은 이미 지난 겨울부터 시작되었다. 눈이 충분히 내리지 않아서 땅은 메말랐고 저수지들마다 농사짓기에 충분할 만큼 물이 차지 않았다. 농업용수 부족이 이미 예견되었다. 그러나 이미 관개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모내기를 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논마다 물을 지하에서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대형 관정과 개울에서까지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들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논마다 양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흙먼지가 날리던 논들이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모내기가 끝났다. 겨우 모내기를 마쳤지만 지금부터는 모를 키우기 위해 논에 물이 본격적으로 필요한 시기이다.
논에 물이 충분한지, 부족한지 물꼬를 보러 다니며 물 조절을 해야 할 시기인 지금부터가 문제이다. 지금쯤 하늘에서 비가 40~50mm 쯤 내려주면 좋으련만 여전히 비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모내기 하느라고 개울의 물까지 끌어다 써서 마을 지천도 이미 바닥이 드러났다. 이대로면 우리 동네 논바닥도 거북등처럼 갈라질 기세이다.
논에 있는 '둠벙'
"옛날에는 이렇게 가물 때는 아버지와 삼촌들이 밤새도록 둠벙에서 고리박질로(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서 논에 대 줬다니께. 뿌옇게 동녘이 밝아오면 그제서야 모내기를 한 논의 모들이 새푸렇게(새파랗게) 살아났다니께. 그런 시절도 살았는데...."
오랜만에 '둠벙'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가뭄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동네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둠벙'이란 논 주변에 물이 솟아나는 곳을 파서 연못처럼 만든 곳을 말한다. 지금처럼 관개시설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에는 논에 둠벙을 만들어놓고 물 조절을 했다. 비가 올 때 물을 가둬놓았다가 논에 물이 필요할 때 퍼 올려 쓰는 용도였다.
노동력으로만 농사 짓던 시절 농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논이 식량자원을 생산하는 곳이라면 논의 부분집합인 둠벙은 배고픈 시절의 별미였던 미꾸라지, 민물 새우, 가물치 등을 잡던 추억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기계화된 농업은 둠벙을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들었다. 바다를 막거나 강변의 범람 지대를 막아서 대규모로 만든 논에 기계가 다니게 되면서 둠벙은 논에서 사라졌다. 최근 논에 있었던 둠벙의 역할이 다양했으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이 밝혀져 다시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동네에는 몇 년 전 인위적으로 만든 둠벙이 있는 곳이 있었다. 논 안에 만든 둠벙이 아니라 천수답인 다랭이 논이 있는 위쪽 골짜기에 둠벙을 파놓았다.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둠벙으로 고이게 해서 민물고기 등을 잡아다 넣고, 고향에서 자연인의 삶을 즐기기 위해 귀향한 지인이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산 속에 둠벙이 생기자 고라니와 삵, 수리부엉이, 딱따구리 같은 야생동물들도 찾는 곳이 되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야생 동물들도 물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고 지인은 자랑을 했다.
"친구, 지석리 골짜기 논에 우리 둠벙에서 물을 터놓았는데 모는 언제 심을겨?"
"그렇지 않아도 친구한테 물 좀 달라고 하고 싶어도 자네가 둠벙에 들이는 정성을 아니께 말도 꺼내기가 어려웠는디 알아서 물을 내려준다니 고맙네."
3년 전, 봄 가뭄이 심할 때 지인은 이 둠벙의 물을 아래쪽 논으로 터주어서 무사히 모를 심게 해주었다. 둠벙이 생김으로써 야생동물들 뿐만 아니라 이웃 간의 정도 돈독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둠벙과 실개천을 다시 활용해야
올해 심각한 가뭄으로 지자체마다 대책을 세운다고 야단법석이다. 최근 6개월간 평균 강수량이 199.7mm로 평년의 53.4%에 그쳤다고 한다. 가뭄과 홍수 등의 기후 변화가 있을 때마다 전국의 사대 강 보와 댐의 저수율을 들먹이며 해법을 찾는다고 하지만 나아진 것이 없다.
둠벙은 빗물과 산이 품고 있는 물을 적극 활용해서 자연적인 생태 순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둠벙의 물이 논으로 흘러들어갔다가 다시 개울로 흐르고 자연스럽게 저수지와 강으로 모이게 된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 둠벙이 사라지고 골짜기와 개울 바닥에 시멘트 유형관을 묻으면서 빗물과 계곡의 물은 정화되지도 못하고 땅으로 스며들지도 못해 지하수를 부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느 정도 대지가 물을 품고 있어야 가물어도 작물들이 견뎌내지만 그동안 땅 속의 물을 너무 말린 결과가 기후 변화에 취약한 환경을 만들었다.
큰 데서만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사라진 둠벙들과 실개천들을 다시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의 가치에 주목해야 기후 변화에 대한 해법이 보인다.
올해는 겨울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지인의 둠벙에도 물이 말랐다. 민물고기들이 살아갈 만큼의 물 밖에 차 있지 않았다. 둠벙 아래쪽 천수답의 주인은 일찌감치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논으로 끌어들여서 물을 채워놓아서 모내기를 마쳤다. 다행히 이 기사를 쓰는 동안 비가 내렸다. 지인의 둠벙에도 다시 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