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
"여러분, 전쟁의 반대말은 뭘까요?"
"평화요."
"헤헤, 쟁전이요!"
"그래요, 평화. 잠깐, 쟁전? 에이, 쟁전은 아니지요. 우리가 아침에 아무 걱정 없이 학교에 오고, 안심하고 집에 가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내는 일상이 평화지요. 그런데, 전쟁이 나면 이 모든 일상이 일시에 멈춥니다. 그리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일만 남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림책 읽어주기
집 옆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러 갔다. 그림책 읽어주기는 내가 마음을 담아 즐겨하는 일 중 하나다. 전쟁을 다룬 데이비드 매키의 <여섯 사람>이라는 책을 읽어주기 전, 전쟁의 의미를 환기하는 중이었다. '쟁전'이라는 장난스러운 답을 들으며 긴 코로나에도 아이들의 생기발랄함이 살아있는 듯 해 다행이었다.
그림책은 여러모로 내게 의미가 깊다. 지난 시절 육아에 지쳐 헤맬 때 동네 그림책 모임에 참여하며 위로와 도움을 받기도 했고, 내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알콩달콩 추억들도 많이 쌓았다. 이제 내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을 만나는 덕분에 50 언저리인 이 나이에도 그림책 읽는 즐거움을 여전히 누리고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코로나로 2년을 쉬다가 아이들을 마주하니 더없이 반가웠다.
<여섯 사람>을 읽어주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왜 하필 여섯 명이냐', '사람들이 다 거북목이다' 등 이런저런 말을 보태느라 좀 산만한가 싶었다. 그러다 어처구니없게 전쟁이 시작되려는 부분에 이르자, 이야기에 빠져 들며 스르르 잠잠해졌다. '정말, 저 물오리 한 마리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다고?' 뒷이야기에 온 정신을 빼앗긴 아이들의 동그래진 눈동자가 일시에 그림책에 꽂히는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20여 명쯤 되는 한 반의 아이들이 같은 이야기 속으로 동시에 초집중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꽉 찬 눈들이 한 마음으로 그림책을 응시한다. 몰입의 극치에 다다른 이 생생한 표정을 보노라면, 그림책을 지은 작가는 아니지만 읽어주는 자로서 느끼는 희열이 있다. 그리고 이 표정을 보는 맛에 이끌려 매번 소개할 그림책을 고르는데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전쟁 같은 주제처럼 사회적 이슈도 살펴보고, 혹여 친구나 가족 내에 걱정이 있는 아이들의 마음에 힘이 될 만한 이야기는 없는지 찾아본다. 진부한 틀을 깨는 이야기, 통쾌한 반전으로 해방감을 주는 이야기,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역사적 사건을 실감하는 데 도움되는 이야기 등 다양한 책들 속에서 주제를 골라본다.
고른 책은 우선 혼자 여러 번 읽으며 드는 감정과 느낌을 충분히 음미한다.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전달할지 목소리 톤과 속도를 조절하며 연습한다. 이야기로 관심을 자연스레 유도할 매끄러운 앞 뒷말들도 생각해놓는다. 집에서 소리 높여 리허설까지 실감나게 하고 난 후, 준비한 그림책을 아이들 앞에서 낭랑히 읽어준다.
그림책이 아니라면
읽어준 후 아이들의 반응이 제각각이다. 특히, 저학년 아이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그 마음을 읽어준 이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다가와 안아봐도 되냐고 묻고 살포시 두 팔로 허리께를 감싸주기도 하고, 언제 또 읽어주는지 아쉬움 가득하게 묻기도 한다. 가끔은 나를 에워싸고 이것저것 끊임없이 묻기도 한다. 고물고물한 아이들의 달콤한 말과 자태에 심장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림책 읽기가 아니라면, 나의 일상 어디에서 이런 순수한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을 길이 있을까? 그림책 읽어주기라는 작은 선물에 대한 큰 답례이자 호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 마음에 쏙 드는 그림책을 읽어주고 온 날은 속이 한참이나 든든하다. 50을 코앞에 두고 이유 없이 허전해지는 마음에 이만한 치료제가 없다.
고학년들은 굳이 소감을 따로 묻지 않아도 잘도 재잘재잘 털어놓는다. 자기가 상상한 뒷 이야기를 큰 소리로 외치는 아이, 혼잣말하듯 자기 느낌을 읊조리는 아이, 손들고 발표 기회를 기다리는 아이 등등. 반응은 가지각색이라도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다. 그 눈빛들을 보며 '오늘 이야기도 아이들 마음 속으로 제대로 들어갔구나!' 싶어 내 마음도 개운해진다.
꿋꿋이 읽어주러 간다
물론, 늘 감동의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재밌어할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감흥이 시원찮을 때도 있고, 가끔은 아이들에게 실수를 지적당해 망신당하는 일도 있다. 언젠가는 2학년 아이들에게 책을 들고 읽어주다가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의 끝을 잡고 넘겼던 모양이다. 중간에 앉은 한 아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큰 소리로 지적을 했다. "근데 왜 더럽게 침을 묻혀 넘겨요?"
하필 그 순간 귀가 막혔는지 재빨리 말귀를 못 알아듣고는 두 번이나 "뭐라고?" 연거푸 물어보는 바람에 더 민망했다. 어렵게 알아듣고 나서야 바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했지만, 속으로는 늙어서 말귀도 빨리 못 알아듣는 아줌마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줘도 되나 싶어 더 부끄러웠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꿋꿋이 읽어주러 간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떠올리고 견줘보게 한다. 아이들에겐 그것이 친구 걱정일 수도, 마음의 상처일 수도, 가족 간의 어떤 사건일 수도, 자신의 미래일 수도 있다.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에 각자의 경험이 녹아들어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한뻠 자라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듣자 하니, 올해는 그림책 읽어주기 학부모 동아리에 신규회원이 16분이나 신청하셨다고 한다. 읽어주는 사람도 보람되고, 듣는 아이들도 좋아하는 이 일이 인기가 높다 하니 참 기분이 좋다. 아이들 마음에 언젠가는 무럭무럭 자랄 생각 씨앗 하나를 심는 일, 아이들의 삶을 주목하고 존중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 그런 그림책 읽어주기의 사랑을 듬뿍 받아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