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직장 한국여성민우회의 동료 활동가는 '1인가구'인데, 동네 친구들과 서로 돌보고 돌봄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다른 동료는 소울메이트이자 룸메이트인 친구와 함께 살고, 또다른 동료는 파트너와 함께 산다. 반려동물과 살아가는 동료들도 많다. '혼인∙혈연∙입양'으로 이어진 법적 가족이 아닌,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족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나나 동료들의 파트너∙친구∙룸메∙반려동물이 질병이나 사고를 겪는다면, 가족들을 돌보기 위한 돌봄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결혼이나 출산, 장례가 발생할 때에도 경조사 휴가를 사용하게 된다. 민우회 내규는 법적 가족만이 아닌 다양한 관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 상황은 전혀 다르다. 법적 가족만 인정할 뿐만 아니라 모계∙부계 여부, 촌수 등에 따라 휴가일수를 촘촘하게 정해놓고 있다. 이런 곳에서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파트너 및 친구의 경조사에 가고 싶어도 특별휴가를 받기가 너무 어렵다. 경조사만 문제가 아니다. 빵빵한 복리후생을 자랑하는 대기업에 다녀도 1인가구에겐 혜택이 많지 않다. 가족수당, 자녀학자금, 가족 의료비 등 가족 관련 지원에서 모두 제외되기 때문이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지는데, 나에게는 연인이나 친구나 반려동물도 가족인데, 우리 회사는 왜 내 가족을 인정하지 않을까?' '나는 결혼도 출산도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왜 하나도 없을까?' '어쩌면 회사는 내 인생에 대해 '정상'이 아니라고 멋대로 규정하는 것 아닐까?'
응답자 4명 중 1명 "가족형태 때문에 기업 복리후생 차별받았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4월 13일부터 5월 8일까지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였다. 다양한 기업 내규의 상황을 확인하고 그에 따른 차별의 경험도 드러내고 싶었다. 그리고 26일간 진행한 설문조사에 총 129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일단 내규 및 복리후생 제도의 내용을 살폈다. '경조사 휴가 지원(86.0%)', '경조사비 지원(73.6%)'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가족수당(50.4%)', '가족돌봄 및 양육을 위해 추가로 사용할 수 있는 휴가(27.9%)', '자녀 학자금 및 학용품 지원(24.8%)' 등 가족 대상 복리후생의 비중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이러한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응답자 10명 중 8명은 자신이 다니는 기업의 내규 및 복리후생 제도에 "'법적 가족' 이외의 다양한 가족형태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69.0%)"는 응답이 가장 높았고, "잘 반영되지 않았다(12.4%)"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반영됐다"는 응답은 12.4%에 그쳤다.
편협한 기업 내규는 실제 차별과 피해의 경험으로 이어졌다. 응답자 4명 중 1명(24.8%)은 내규 및 복리후생 제도와 관련해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을 겪었다. 한 응답자는 "8년간 사실혼 관계였는데 아무 혜택을 받지 못했다. 결국 혼인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파트너 조부모님 돌아가셨지만 출근했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도 '법적 가족'이 아니면 경조사에 제대로 참여하기 어려웠다. 한 응답자는 "동거하는 파트너의 조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슬픔에 잠겨 정상 업무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개인 (연차)휴가를 쓰지 못해 저녁에나 장례식에 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돌봄 등의 긴급한 수요에 따른 휴가에서도 '법적 가족'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 응답자는 "코로나 감염 및 격리에 따른 돌봄 휴가, 수당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고, 다른 응답자는 "동거인이 아파도 회사에 휴가를 쓰겠다고 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대다수 내규가 결혼과 출산∙육아를 전제로 노동자의 '생계 부양'만을 집중 지원하다 보니, 1인가구나 비혼가구 등 다양한 노동자가 소외되는 상황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응답자들은 "결혼과 육아를 하지 않는 경우 복리후생 중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없다"고 지적했다. 다른 응답자는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인생 과제를 아직 하지 못한" 것 같은 시선을 느꼈다고도 했다.
일부 응답자는 부계중심적으로 위계를 두는 내규 때문에 차별을 겪었다. ▲장례휴가를 조부모∙백숙부모 등 부계 친척에 대해서만 지급하고 이모∙이모부 등 모계 친척은 제외한 경우 ▲승중(부모가 돌아가신 장손)의 경우 휴가나 비용을 추가 지급하는 등 장손에 더 많이 지원한 경우 ▲부모와 주거지가 다를 경우 장남과 장녀에 대해서만 가족수당을 인정하는 경우 등의 사례가 나타났다.
절반 이상 "차별에 대응 못해"… 문제 제기해도 "부정 여론"
가족형태에 따른 내규 상의 차별은 구체적인 피해로 이어졌다. 응답자들은 차별로 인해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해 생계 부담 증가(71.0%)', '노동시간 관련 혜택을 받지 못해 스트레스 증가 및 시간빈곤 발생(48.4%)', '직장에 대한 소속감 하락 및 업무동기 저하(48.4%)' '정체성 및 생활방식에 대한 자존감 하락 및 위축(41.9%)' 등의 다양한 피해로 이어졌다(중복 답변).
경제적인 문제, 시간빈곤 등 직접적인 손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직장내 소속감이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하락하는 심리적 피해도 적지 않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55.6%)은 가족형태에 따른 내규 상의 차별을 경험하면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노동자 대변기구를 통해서(18.8%)' 또는 '직장 공식 절차를 통해서(9.4%)'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10명 중 3명도 안 되었다(중복 답변).
"문제제기를 했다가 해당 규정이나 관행이 개선됐다"는 응답자는 0명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히려 "본인에 대해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됐다"는 응답이 절반이 넘는 55.6%에 달했다(중복 답변). 응답자들은 "왜 사실혼을 유지하려 하냐", "(혼인신고도 안했는데) 진실된 사랑인 지 어떻게 아냐" 등의 차별 발언을 들어야 했다. "안건을 제안했지만 제 개인의 문제로 귀결됐다"는 응답자는 '내가 잘못된 것인가'라고 자책했고 "조직에서 보호받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77.5%는 "가족다양성 있는 기업으로 이직 의향"
그러나 가족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은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가족범위'에 대한 인식을 물었을 때 "혈연∙혼인∙입양으로 구성된 법적 가족"이 가족이라는 응답은 28.6%에 그쳤다. 응답자들은 '주거공간을 공유하는 연인 및 친구(29.5%)', '주거공간 공유와 상관없이 나와 친밀한 연인 및 친구(24.0%)', '주거공간을 공유하는 사람 누구나(9.3%)' 등 다양한 관계를 실제 자신의 '가족'으로 인식했다. '반려동물'을 가족에 포함해야 한다는 기타 응답도 많았다.
이뿐 만이 아니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기업 내규 및 복리후생 제도의 가족다양성 확대'를 찬성했다. 응답자의 88.4%는 다양한 가족형태에 대한 복지 지원에 동의했고, 역시 88.4%는 1인가구에 대한 복지 확대에 동의했다. 이러한 응답은 가족에 대한 인식, 실제 주거형태 등과 무관하게 나타났다.
또한 응답자 94.6%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괄하는 직장이 더 일하기 좋은 노동환경"이라고 동의했고, 역시 94.6%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괄하는 직장에 자부심을 느낄 것"이라고 동의했다. 가족다양성을 반영하는 회사에서 소속감∙업무동기가 모두 늘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괄하는 직장으로 이직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도 77.5%에 달했다.
대안적 내규 및 복리후생 확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응답자들은 "조직내 최고결정권자의 의지(58.9%)"와 "조직내 인식변화(38.0%)"를 꼽았다. 실효성 있는 변화를 위해서는 기업 측의 제도 도입과 조직내 인식의 변화가 모두 중요하다고 답한 셈이다.
반려동물도 가족으로 인정하는 회사… 안 될 게 뭐야?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러쉬코리아는 비혼을 선언한 노동자에게 결혼한 노동자와 같은 내용의 축하금과 유급휴가를 지원한다. 한겨레는 4인 '정상가족' 중심의 가족수당을 폐지하고 직원 복리후생에 재원을 사용하기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가족' 개념에 법적 가족 외의 다양한 가족형태를 포함하는 모범 단협안을 만들었다. 반려동물에 대해 경조사휴가와 보험료를 지원하는 회사, 반려동물 동반 출근 제도를 시행하는 회사도 있다.
외국은 한발 더 나아갔다. 미국에서는 가족돌봄휴가의 돌봄 대상에 '선택된 가족' 즉, 혈연이나 법률혼으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마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친밀한 자('가족 다양성의 현실과 정책 과제: 비친족 친밀한 관계의 가족 인정 필요성', 국회입법조사처, 허민숙, 2022')를 포함한다. 캐나다는 노동자가 중병이나 상해 등을 겪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 일하지 못하면 임금의 55%를 보전해 주는데, 대상 여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노동자가 가족으로 여기고 있는지'다.
상황이 이런데도 구태의연하게 '법적 가족'만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 내규 및 복리후생은 다양한 가족을 이룬 노동자들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또한 이는 단지 노동시간이나 비용상의 혜택만의 문제는 아니다. 평등한 일터의 문제이다. 직장에서 자신이 선택한 삶,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노동자가 안전하고 존엄하게 일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차별적 내규는 차별적 사회의 관행을 유지∙확대한다. 부계 친족의 장례에 더 많은 휴가를 지급하는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는 부계중심적인 가족문화를 자연스럽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생계부양' 중심의 복리후생 제도만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는 비혼으로 살아가는 동료를 '생애 과업을 달성하지 못한 미성숙한 존재'로 여길 수 있다. 동성 파트너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유지할 것이다.
가족 생계부양 중심으로 복리후생이 구성된 것도 문제가 있다. 이는 결혼과 출산만을 사람의 '정상적 생애주기'로 인정하는 편협한 사고이다. 또한 한 노동자를 '가족의 생계부양자'로 전제하면 가족 내 다른 구성원은 자연스럽게 '피부양자' 또는 '가족돌봄 및 생계보조'를 맡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런 구조에서 여성의 노동은 '반찬값 버는 부업'으로 취급 받는다.
시작은 '지정한 1인'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꿀 수 없다면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보자. 경조사∙돌봄 휴가 등 직장 내 복리후생에서 인정되는 가족의 범위에 '내가 지정한 1인'을 포함하는 것부터 시작해 점차 제도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성별이나 가족내 위계 등에 따라 차등적 혜택을 부여하는 제도는 당장 시급하게 손봐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한국여성민우회는 오는 6월 27일부터 법 밖의 가족형태를 아우르기 위한 현실적 방안의 하나로 ▲경조사∙돌봄휴가 등 직장 내 복리후생에서 인정되는 가족의 범위에 '노동자가 지정한 1인'을 추가하고 ▲모계∙부계 구분 등의 차별적 조항 폐지 등의 내규 개선을 제안하는 회사 내규 바꾸기 캠페인 '선택가족을 인정하는 기업으로 레벨업!'을 펼칠 예정이다. "나의 삶, 나의 정체성, 나의 가족도 똑같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노동자들에게 이제 기업이,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가 응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