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산중앙호수공원 분수대 앞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다. 삶이 너무 힘들다며 도와달라는 애절한 목소리 "저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라는 '사회실험' 영상제작이었다.
화창한 날 위태로운 남자의 팻말엔 '당신의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영상 시작 후 짧은 시간 동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과 무심코 지나는 발자국들 속에 남자는 위태롭게 서 있었고,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안타까웠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빈 걸음으로 지나가던 그 순간, 조용히 다가온 두 남자가 말없이 주인공을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연이은 따뜻한 발걸음. "사람들이 가끔 포기할 때가 있잖아요.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적었어요"라는 초등학생 아이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아들과 산책 나온 한 여성은 "그냥 외면할 수가 없었어요. 제게도 좌절했던 순간이 있었거든요. 이분에게 어딘가에서 소중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힘이 되어 주고 싶었습니다"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민 김정순씨는 "서산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서산에 공감 능력이 높은 분들이 많아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라고 했고, 김명환씨는 "서산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확인하는 귀한 영상입니다. 작은 손 내밀며 함께하는 모습과 포기하지 말라는 학생의 모습. 참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9일 '자살예방캠페인' 사회실험 영상(https://youtu.be/POTvwIXY9T0) 기획을 한 넥센타이어 서산지점 서재표 소장은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누구보다 세상의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꿈과 희망을 품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시다"는 말로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이런 귀한 영상을 만들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장님을 만나면서 영상을 제작하게 된 얘기를 들으려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경남에서 아버지의 고향 서산으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유라도 있었는지요?
"저희 집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식당을 운영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장사가 어느 정도 됐던 거로 기억합니다. 그러던 중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불어닥쳤습니다. 1997년 11월 21일 "시청자 여러분. 정부가 결국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경제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 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 아픈 처지가 된 겁니다"라는 MBC 뉴스데스크 이인용 앵커의 오프닝 멘트가 흘러나왔지요.
그즈음 직장을 잃거나 생활고에 시달린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와 함께 가정이 무너져 해체되는 안타까운 사례들도 속속 뉴스를 타고 보도되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가정이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평범한 말이 그래서 더욱 절실했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듬해 1998년 IMF 가계 부채가 늘면서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이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던 우리 집은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뼈아픔을 겪어야 했던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어디로 가도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요.
연어가 고향에서 산란을 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모든 것을 정리하고 회귀본능하듯 아버지의 고향 서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제 나이 10살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강인한 모습의 우리 부모님은 그길로 맞벌이를 하기 위해 사회에 뛰어들었죠. 힘들어했을 텐데도 늘 밝은 모습을 잃지 않으신 두 분,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 속에는 당시 힘들었지만, 여전히 최선을 다하신 당신들의 모습이 내재되어 지금의 저로 지탱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때는 국민 대부분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는데 소장님의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온 국민의 피땀 어린 정성으로 IMF 체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경기침체의 터널은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학업에만 묶어두지 않았죠. 고등학교에 다니며 버스비와 용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설렘과 씁쓸함이 교차되는 시간이었죠. 원래 손이 빨라 일을 배우는 속도가 남들보다 빨랐던 것 같습니다. 일이 손에 익으면서 재미도 붙었죠. 그렇게 제 학창시절은 가난했기 때문에 미리 사회를 경험할 수 있는 경험치를 쌓아갈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는 지금, 이제는 압니다. 그때의 경험이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인에게 인정을 받으며 어쩌면 다른 것들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더불어 얻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학업과 일을 같이 병행하며 힘들어하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 넥센타이어에 입사하게 된 계기를 들려주세요.
"24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8살 5살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결혼 초 생활하기 위해 용역회사에서도 일해보고, 공장에서도 근무하면서 생활고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위기가 닥쳤어요. 주야근무하는 곳에서 3개 조 중 1개 조를 인원 감축한다는 내용이 전달된 거죠. 그러면서 자진 퇴사 요청해오더군요. 당시 생각이 어렸던 건지 퇴사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도 있는데 무작정 관뒀다는 것이 가장으로서 부족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위기 안엔 기회가 있다고 했던가요. 천만다행인지 당시 지금의 '넥센타이어 서산영업소'가 처음 개소하면서 물류 직원을 모집하더라고요. 제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죠. 정말 운 좋게 입사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4대보험 제외 후 약 180만 원 정도의 월급으로 가정을 꾸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퇴근 후 친구와 함께 대리운전을 했고, 쪽잠을 자고 난 후 떠지지 않은 눈을 비벼가며 새벽에 일어나 다시 우유배달을 했습니다. 이 모습을 예쁘게 본 모양이에요. 어린 나이에 힘들지만 성실함과 책임감, 그럼에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보신 당시 넥센타이어 영업소장님께서 본사에 영업소장으로 지속해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제 삶을 반추해보면 뭐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앞말 보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넥센을 만나 연륜 있는 분들을 접하면서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 얼마 전 서산청년회의소 JCI에서 만든 '자살예방캠페인' 동영상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소장님께서 기획하셨다던데.
"유튜브에서 자살에 관한 의미 있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삶의 끈을 놓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런 순간이 있었고요. 우리는 어쩜 무엇인가 살아가야 하는 동력이 있어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동력이 없으면 혹 무너진 삶이 될 수도 있지 않을 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 때 그 사람에게 조력자가 되어 동력을 만들어준다면? 살아갈 희망의 말 한마디를 해준다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자살예방캠페인이었습니다. 제 의견을 서산청년회의소 조항효 회장님께서 의견을 전달했고, JCI에서 수용하여 앞장서 만들 수 있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세상 모든 이가 주인공이라는 말씀을 꼭 전해드립니다. 살다 보면 좌절할 수 있고, 살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딛고 다시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실패가 디딤돌이 되어 성공으로 가게 되는 길이 되어 준 거지요.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또 성공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세상은 크고 할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자기 자신이지요. 잘 된다고 요원할 수는 없고, 못된다고도 요원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맘껏 삶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길에 미약하나마 저도 늘 함께하겠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바로 마음먹기에 달려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