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Koo, former Presid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China - whose reputation as a patriot had been won partly through his success at exterminating unpopular Japanese - died from four shots of Korean army officer's American pistol at about 12:30 p.m on June 26th. The whole country was stunned and horrified at the news.
6월 26일 오후 12시 30분경,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한국 육군 장교(소위)가 쏜 미제 권총 네 발을 맞고 사망했다. 김구가 애국자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일본인 요인 암살에 성공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그의 저격 소식에 전국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 미 육군 정보문서(Army Intelligence Documents) 1949년 7월 11일자 전문 427호(문서번호 895.00/7-1149
위 미 육군정보문서는 2004년 1월 31일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백범 김구 암살 규명 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문서상자에서 찾은 일부다(번역은 당시 재미 동포 유학생 자원봉사자 이선옥씨가 했다).
나는 그 전해인 2003년 10월,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하다가 당시 부천의 버스기사였던 박기서 의인에게 몽둥이세례로 피살된 이후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 중이던 권중희 의인을 인터뷰한 바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면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에 가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을 원 없이 들쳐보고 싶다고 했다.
이 인터뷰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나가자 누리꾼들이 벌 떼처럼, 들판의 불꽃처럼 일어나 "권중희 선생을 미국으로 보내자"는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모금 시작 보름 만에 목표액 3천여만 원이 쌓여, 권 선생과 기자는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9.11 사건을 호되게 겪었던 미국은 자국의 국익에 심대한 위해가 염려되는 문서는 죄다 수거하여 다시 비밀상자에 담아 버린 뒤라고 그곳 아키비스트가 귀띔을 했다.
그래서 우리 김구 팀은 귀국하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벌이다가 북데기 속에서 알곡을 찾는 농부의 심정으로 핏발을 세우며 40여 일간 문서를 뒤졌다. 하지만 끝내 알곡은 얻지 못한 채 허망하게 귀국한 바 있었다.
네 발의 총성
"탕! 탕! 탕! 탕!"
서울 한복판 경교장(京橋莊)에서 한낮 정적을 깨뜨리는 네 발의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그날은 1949년 6월 26일(일)로 초여름치고는 무더웠고, 경교장 일대는 도심답지 않게 고즈넉했다. 그날 정오가 조금 지난 12시 34분 무렵, 육군 정복 차림의 안두희 소위는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향하여 미제 45구경 권총 방아쇠를 네 차례나 당겼다.
네 발의 총알은 김구의 얼굴과 목·가슴, 그리고 아랫배를 관통했고, 그 가운데 두 발은 집무실 유리창도 꿰뚫었다. 또한 그 총알은 백성들의 간장을 찢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민족정기에 움푹한 생채기를 남겼다.
그날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날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암살범 안두희를 둘러싼 백범 시해사건 배후는 아직도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그동안 시계 제로의 컴컴한 암흑 속에서도 암살범을 끈질기게 추적 응징하고, 그 진상을 밝히고자 고군분투한 의인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김용희·곽태영·권중희·박기서 씨 등이다.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지만 나는 기록자로 곽태영·권중희·박기서 씨를 만나는 행운을 가졌다. - 박도 지음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5-6쪽
예로부터 영웅은 죽을 자리를 알았다. 김구는 (안두희가 쏜) 그 총알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당신은 이 나라와 겨레, 그리고 후세 역사를 위하여 희생양이 된 것이다.
첫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조국의 수호신에게 바쳤다. 두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당신이 사지로 보낸 동지들에게 바쳤다. 세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바쳤다. 네 번째 총알로 흘린 피는 이 나라 후세들에게 바쳤다.
김구는 분단의 상징인 38선 위에 당신을 느꺼이 제물로 바쳤다. 그러면서 당신은 한 알의 씨앗을 조국 분단선상에 뿌렸다. 언젠가 그 씨앗의 싹이 돋아 무럭무럭 자란 뒤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곡식의 열매를 먹고 자란 후세들이 힘을 길러 언젠가는 제 힘으로 38선 철조망을, 휴전선 철조망을 걷어 낼 것이다. 그때 김구 당신은 겨레의 구원자로 진전한 통일의 지도자로 이 땅에 우뚝 부활할 것이다. - 박도 지음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290-230쪽
백범 어록
도서출판 단비에서 이주영이 엮은 <김구 말꽃모음>에서 백범 선생의 말씀을 뽑아 곱씹으면서 '백범 73주기' 추도의 날 삼가 엎드려 경배를 드린다.
나라는 내 나라요, 남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겨레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이를 깨달아 이대로 움직인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 될 수도 없다. (16쪽)
과거에 낙방한 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하게 되거나 부자가 될 것 같은 좋은 생김새는 없고 천하고, 가난하고, 나쁘다는 모양이었다. …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준 것이 <마의상서> 중에 있는 이 글이었다.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18쪽)
독립은 다른 사람 힘에 기대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 힘으로 자주성을 갖춘 독립이라야 비로소 민족이 편안하고 나라가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길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101쪽)
나는 좌우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통일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통일이 없이 독립을 빨리 이룰 수 있는 더 좋은 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성공할 때까지 좌우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105쪽)
이 목숨을 조국이 필요로 한다면 당장이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세우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내 한 몸 편하고자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131쪽)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할 일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모두가 의좋고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170쪽)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