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 내가 그림책에 빠지고 만 그날, 씨앗 하나가 마음 깊은 곳에 톡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그림책을 쓰고 싶다'라는 꿈의 씨앗.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한 소망이었지만, 언젠가 그림책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비밀스레 품고, 아이와 함께 또는 따로 그림책들을 읽어 왔다.
그후 그림책의 매력을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모임과 그 일을 조금 더 깊이, 제대로 하고 싶어 배운 그림책 테라피까지. 그 모든 과정이 그림책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림책 활동'이라는 내 부캐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직접 그림책을 쓰는 삶, 바로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부캐의 목표를 이루다
어쩌면 이제 나는 그 꿈을 이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얼마 전 한 전집 출판사와 그림책 세 권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 막연했던 꿈이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궁극이라고 여겼던 지점은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 서 보니 목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만 주며 계속 걸어가라고 동기를 부여하는 작은 이정표의 하나일 뿐이었다.
설렘, 기쁨은 잠시뿐, 다시 새벽마다 책상에 앉아 하얀 화면을 마주하며 어깨와 허리통증을 벗삼아 지난한 작업을 이어나간다. 계약이 되었다고 해서 마법처럼 필력과 창의력이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작품 제안이 도착하는 일도 없으니까 계속 쓸 수밖에 없다. 모든 게 원위치다. 궁극의 실상은 그런 것이었다.
끝이라고 여겼던 지점에서야 끝이 없는 성장의 계단 중 겨우 한 칸에 막 올랐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갖고 있었던 노력과 성공에 대한 나의 관념을. TV며 SNS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무시로 받아들였던 성공하는 사람들의 신화와 자기 계발 광고가 얼마나 큰 환상을 양산하고 있는지를.
요즘 글쓰기뿐만 아니라 다이어트, 자기 계발이나 재테크 분야 등 단기간에 성공과 부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광고를 자주 본다. 처음 그림책 글쓰기 강의를 들었을 때의 내가 떠오른다. 그때의 나도 무의식적으로 단기간에 결과를 바라는, 비법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이지 못한 시각을 품고 있었다.
전문가들이 귀한 가르침을 전수했으니, 쓱쓱 써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내가 간과한 것은 이 분야와 관련한 내 경험치나 능력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고수들의 방법을 안들 그것을 소화하고 여과시켜 나만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될 리 없지 않은가? 시간이 필요하다. 글쓰기는 특히 그렇다.
로스 뷰렉이 그리고 쓴 그림책 <참을성 없는 애벌레>에는 방정맞은 애벌레 하나가 나온다. 하루아침에 나비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치 안에서 한참 있어야 하는 걸 알게 된 애벌레. 집중하고 기다리라는 주변의 조언에도 결국 참지 못하고 때 이른 탈출을 감행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채우지 못한 채 나비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도 딱 그 애벌레 같았다. 빨리 결과를 내고 싶어 조바심이 났지만 꿈과 현실의 차이는 컸다. 첫 합평 원고에 대한 작가님의 피드백이 떠오른다. "그림책 쓰기는 일기쓰기와 달라요." 추운 계절인데도 얼굴이 새빨개져 땀이 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음엔 기가 막히게 쓰리라 다짐했건만 오십보백보인 원고를 내던 심정은 또 어떻고.
부끄러웠지만 인정할 수밖에. 그 뒤로 쓰는데 도움을 얻고자 작가님 조언대로 동시집을 필사해 오고 있다. 바쁘면 놓치기도 하지만 매일 글을 쓰기로 정해놓은 시간에 앞서 한편의 동시를 베껴 쓰고 간단한 느낌을 적어둔다. 고전이라 불리는 그림책들과 동화도 읽고 공부한다.
필사 노트가 한 권 한 권 쌓이는 만큼, 깊이 읽는 작가들의 목록이 길어지는 만큼 실력이 팍팍 늘면 좋으련만 여전히 나는 그림책 쓰는 일이 막막하고 어렵다. 그래도 이번 전집 작업을 하며 문장이 좋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간 매일 조금씩 기울였던 노력의 시간이 영 헛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재능과 감각을 겸비하고 빨리 출간에 이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많은 그림책을 써냈고 현직 그림책 출판사 편집장인 나의 스승조차 여전히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한다. 또 작가에게는 거절이 일상이라고 '좌절 금지'를 강조했다. 숨겨진 '고수의 비법' 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오로지 과정을 견디며 묵묵하게 읽고 써나가는 것밖에는.
매일 쓰고 다듬어 한 달에 한 번 있는 합평회에 제출하고 의견을 주고받지만 실력은 제자리걸음이다. 하지만 그렇게 알게 되었다.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가 하는 내 마음을. 보장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속상함과 두려움보다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는 것을. 그 마음에 힘입어 다음 합평회를 기다리며 원고를 다시 고쳐 써나간다.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것은 느려 보이지만 사실 그 일을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하고 싶은지 알려주는 방법이자, 조금씩 성장하며 소박한 성취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아닌가 한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기 때문에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그림책을 직접 쓰고 계약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처음 시작점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기보다 이미 그 분야에서 성공한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다가 쉽게 포기한다. 원래 성장의 속성이 그러한데도, 바로 몇 걸음만 더 가면 있을 계단을 오르지 않고 그만둔다. 그리고 다른 비결을 다시 찾아 헤맨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고치를 찢고 나오는 애벌레처럼.
"인생은 토너먼트가 아니라 리그"
궁극이라 여겼던 지점에서 알게 된 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초라한, 보잘것없는 나를 마주하면서, 도망치지 않고 어제의 나로부터 딱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 끝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길 위에서 불안과 초조를 견디고, 불투명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부푼 성공의 환상을 걷어내고 출근처럼 반복되는 지루한 작업을 이어나가는 것. 세상이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작은 성장을 기록해 나가는 것.
나는 그림책을 쓰며 그것을 배웠지만 세상만사,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인 한 분은 비용을 들여 PT를 받고 단기간에 멋진 몸매를 만들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자신과 싸워야 하는 힘든 과정을 이겨낸 그분은 만족감과 성취감을 경험하며 좋았지만, 유지와 관리에는 새로운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모두가 쉽고 빠른 성공을 꿈꾸고 그러한 비법이 상품으로 팔리는 시대, 적어도 내가 듣고 배우고 경험한 그 길은 화려한 스포츠카를 몰고 달리는 고속도로가 아니라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걸어야 하는 등산로였다. 힘겹게 올라와 눈에 보이는 것도 기대했던 바와 달랐다.
우리나라의 안데르센 상 글 부문 추천작 <1945, 철원>을 쓴 이현 작가의 장편동화<플레이볼>은 평범한 노력파 한동구가 야구를 계속 하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을 다룬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야구는 내내 잘하고 이기는 게 아니다. 잘 못하고 지고, 비참하고 괴롭고, 그럼에도 다시 운동장에 서야 하는 거다. 야구하는 게 내내 지는 거다. 인생은 토너먼트가 아니라 리그다. 야구만 그렇나. 사는 것도 그렇다.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지. 3할이 어데고? 1할만 해도 장하다."
그림책을 쓰면서 꿈을 향해 나가는 일이 지는 것의 연속임을, 잘 지고 다시 운동장에 서는 법을 배워간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이고 시작이지만, 멈춤 없이 꾸준히 걸어 온 길의 방향은 제대로 잡았구나 알려준 이정표에 힘입어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음 이정표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도 계속해서 걸어갈 힘을 내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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