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그림책 이론을 공부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그림책 이론서를 주로 읽지만 독서모임은 아니다.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북클럽은 더더욱 아니다. 그림책에 대한 전문 지식을 쌓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그림책이라는 장르에 대해 공부하는 모임이다. 북클럽보다는 스터디에 가깝다. 어쨌든 공부하는 모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모임을 '자발적 시민모임'이라 명명하고 싶다. 나는 사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자발적 시민모임 운영자 되기'는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꽂혔는지 모르겠다. 지적 허영심이 충만한 내가 어느 책에선가 읽고 멋있다 생각했을 수도 있고, 강연에서 혹은 어떤 친구가 하는 말을 듣고 홀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발적 시민모임을 열어야 해'라는 자기실현적 예언을 해왔고, 불현듯 지금이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길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발적 시민모임, 어떤 주제로 해야 할까?' 이게 문제였다.
정치, 젠더, 평화, 봉사, 육아, 인권, 환경, 독서 등 시민모임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정치에 관심은 많지만, '정치하는 엄마들'처럼 앞에 나서 내 목소리를 낼 만큼은 아니다. 대학 시절 '노숙자 봉사활동'같은 것도 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도와야겠다는 큰 깨달음을 얻고 끝나고 말았다. 육아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할 말은 가장 많지만, 신세한탄만 하다 끝날 공산이 커서 모임으로는 패스.
일단 모임을 이끌려면 내가 잘 알고, 자신 있는 걸로 해야 되는데... 그럼 하나밖에 없네... 그림책. 나는 대학에서 아동학과 국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아동문학교육을 공부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린이책 출판기획자로 일했다. 퇴사 후엔 1년 동안 유럽을 여행하며 도서관, 서점, 미술관 등에서 그림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성인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독서교육 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고, 독립서점에서 그림책을 주제로 강연을 한 경험도 있다.
이 정도면 전문가인가? 자신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자신감이 뿜뿜 하지는 않았다. 아직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고, 내 책상 위엔 읽어야 할 책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이럴 땐 어떤 그림책을 읽어야 해?' 조언을 구하는 친구의 부탁에 여전히 척척 답이 튀어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무엇보다 3년 가까이 육아에 매달려 사느라 전문가로서의 포스를 다 잃고 말았다.
금세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하지 말까? 실력이 뽀록나고 창피만 당하면 어쩌지? 그나마 남아있는 약간의 자존감마저 바닥나 버리는 거 아닐까?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아기만 키우며 살 수는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너무나 숭고한 일이지만 나의 삶도 소중했다. 임신, 출산, 육아의 쓰나미 속에 잃어버리고 살았던 나를 다시 되찾고 싶었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순간 절박함이 휘몰아쳤다.
처음엔 좀 우당탕탕하겠지만 모임을 통해 나 역시 많이 배울 것이고, 더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전문가를 만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자.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퇴근하고 집에 온 남편에게 그림책 모임을 열었다고 이야기하니, 대번에 잘했단다.
"사람들이랑 친해지면 같이 브런치도 먹으러 다니고 놀러도 다녀. 집에만 있지 말고."
뭐? 브런치나 먹으라고? 혼자 육아를 도맡아 하며 낑낑대는 아내를 위한 진심 어린 응원이란 걸 안다. 남편 따라 지방에 내려와 몇 년째 친한 친구 하나 없이 지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딘지 서운하다. 나는 다 계획이 있어서 하는 모임인데...
사실 남편 말대로 모임이 흘러갈지도 모른다. 공부는 뒷전이고, 육아에 지친 엄마들이 모여 브런치를 앞에 두고 하소연만 늘어놓다가 끝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으로선 이 모임이 계속될지 말지도 아직 미지수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대가 된다. 뭔가 내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이 모임에 내 미래가 달렸다는 생각이 든다면 너무 오버려나.
덧붙이는 글 | 제 개인 브런치에도 같은 내용으로 계속 연재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