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과한 대출을 받아 부동산·주식 등 자산을 매입한 '영끌족(영혼까지 끌어모은 투자자)'에게 "위험성이 있다"며 "금리인상기에 자산 가격 조정은 당연히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 총재는 13일 오전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에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집을 사려하는 청년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는 질문을 받고 이 같이 말했다.
그는 "현 20·30대는 경제 생활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인플레이션을 경험해본 적 없는 분들"이라며 "0~3% 이자율로 돈을 빌렸고 평생 그 수준이 유지될 걸로 생각하고 집을 샀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볼 때, 그런 가정은 변할 수 있다. (이런 가정 하에) 경제 활동을 하는 건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은 총재의 경고
한은은 이날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0%포인트 인상하는 '빅 스텝'을 단행했다. 이로써 기존 1.75%였던 기준금리는 2.25%로 크게 올랐다. '제로금리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던 지난해 8월 첫 금리인상 시점으로부터 약 10개월동안 금리가 1.75%포인트 오른 것이다.
한은이 빅 스텝을 결정한 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금리를 세 달 연속 올린 전례도 없다. 따라서 한은이 치솟는 물가에 전례없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이번 빅 스텝에 반영돼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6%에 육박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1월 6.8%를 기록한 이래, 23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와 관련, 금통위 통화정책방향 회의 의결문에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석유류 가격의 높은 오름세가 지속되고 여타 품목도 가격 상승폭이 확대되면서 6%로 크게 높아졌다"고 명시됐다.
게다가 물가 상승의 정점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금통위는 "소비자물가가 당분간 6%를 상회하는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창용 총재 역시 이날 "올해 3분기 말이나 4분기가 물가 정점일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높은 물가를 잡기 위해 한은이 빠른 속도로 금리를 인상하는 과정에서 가계·기업 부실 등 부작용이 생겨날 수 있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은행 등 금융기관이 더 비싼 비용을 치르고 돈을 빌려와야 한다. 자금 조달 비용이 증가한 만큼 금융기관이 소비자들에게 받는 금리도 높아진다. 기준금리 인상이 소비자의 이자 부담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심지어 금리가 오르는 만큼, 제로금리 시대에 변동금리로 돈을 빌린 소비자들의 원리금 상환 부담도 늘어난다. 최근 시장에서 제기되고 있는 경기 침체 우려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금리 인상으로 가계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국내 경기 침체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다.
실제 한은이 지난 5월 발표한 1분기 잠정 통계에 따르면, 가계대출과 판매신용(카드, 할부 등)을 합한 가계신용 잔액은 올해 1분기말 기준, 1859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증가세는 둔화됐지만 전년 동기 대비 5.4% 늘어난 수치다. 지난 5월 국제금융협회(IF)는 올해 1분기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을 104.3%로 집계했는데, 이는 집계 대상 36개국 중에 가장 높다.
한은, 경기 침체 우려에도 '물가 잡기' 택한 이유
이 총재가 이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 내린 결정"이라고 언급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고물가를 잡기 위해선 당장 금리인상이 시급하다고 느끼면서도, 금리를 인상할 경우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앞서 금통위 의결문에도 "국내경제는 소비 회복세가 이어지겠지만 주요국 성장세 약화의 영향으로 수출이 둔화되면서 금년중 성장률이 지난 5월 전망치(2.7%)를 다소 하회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금통위는 또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도 높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한은은 경기 침체보다 고물가를 향해 칼을 빼들었다. 경기침체를 점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인 반면, 연일 치솟고 있는 물가는 한은이 당면한 '급한 불'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 총재는 이날 "경기 둔화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세부터 꺾을 계획이냐"는 질문을 받고 "물가가 오르는데 경기까지 나빠지면 어느 쪽에 중점을 두고 볼 것인지 정해야 한다"면서도 "현재는 6% 넘는 물가를 잡는 게 경기와 거시 경제에 모두 좋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한편 금통위가 물가를 잡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만큼, 당분간 기준금리는 더 오를 전망이다. 이 총재는 "시장에선 올해 연말 기준금리를 2.75%~3.00%로 내다보고 있는데 그 수준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하지만 주요 선진국들의 변화 등 여러 요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올해 안에 한은이 다시 한번 빅스텝을 밟을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 "3~4분기 이후 물가 상승세가 꺾인다는 가정 하에 0.25%포인트 상승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되거나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하고, 전 세계에 경기침체가 커지는 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