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계 역사상 방송작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정용석 부장판사)는 14일 오후 2시 MBC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해고 재심 판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MBC) 패소로 판결했다. '해고된 작가 2명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이며 MBC에서 부당해고됐다'는 지난해 3월 중노위 판정에 손을 들어줬다. MBC는 이 판정에 불복해 지난해 4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오후 1시55분, 재판부가 들어오기 5분 전부터 방청석은 30여명의 방청객으로 꽉 찼다. 해고 작가 A·B씨를 포함해 방송작가유니온 관계자, 서울여성노동자회 활동가, 동료 방송작가 등이 선고를 보기 위해 법원을 찾았다. 25개 좌석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몰려 일부는 서서 재판을 들었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선고 후 서울행정법원에서 만난 A씨는 판사의 입에서 두 마디가 나오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판사의 작은 웅얼거림으로 5초 만에 끝난 선고였지만, 소송 시작부터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을 외웠던 말이었다"며 "소송 시작 때, 저 두 마디가 나와야 이긴다고 변호사님이 말해준 후 정말 이 말만 되뇌어왔다"고도 했다.
부당해고된 작가 A·B씨는 2010년부터 2020년까지 MBC 아침 뉴스 '뉴스투데이'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그러다 2020년 6월 회사의 갑작스런 통보에 일방적으로 계약이 해지됐다. 두 작가가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출하면서 MBC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서울지노위에선 '방송작가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각하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이에 불복해 중앙노동위원회에 다시 구제신청을 냈다. 중노위는 이들이 근기법상 노동자가 맞으며, 해고도 부당했다고 판정했다. 노동위원회가 방송작가를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로 인정한 최초 사례다.
"MBC 측 서면 볼 때마다 분노에 휩싸여"
선고 직후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A씨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6일 전 택시 호출 서비스 '타다' 운전기사를 근로자로 인정한 중노위 판결을 취소하라는 법원 판결의 영향이 컸다. A·B씨 모두 "우리보다 증거가 훨씬 풍부해서 부러워했던 사건이었다"며 "타다 기사들이 졌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하는 불안감에 6일 동안 잠을 설쳤다"고 했다.
해고된 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등록해 공부를 하고 있는 A씨는 "불안한 마음에 우리 재판부 판사가 어떤 관점의 사람인지 궁금해 지난 판결을 싹 다 검색해보기도 했다"며 웃었다.
A씨는 회견에서 지난 2년을 되돌아보며 "정신적 식물인간으로 산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직업을 잃어 글을 쓰지 못한 것에 더해, MBC는 재판 과정에서 우리의 10년을 부정하고 거짓말쟁이이자 무능력자로 몰았다"며 "MBC 측 서면을 볼 때마다 분노에 휩싸여 '이러다 스트레스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B씨도 "MBC에서 오래 일한, 우리에게 지시를 했던 기자가 증인으로 나왔는데, 자기 지시를 두고 '우리가 너무 소극적이고 업무 능력도 떨어져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말했다"며 "10년을 일한 회사인데... 내가 구겨지는 느낌에, 이런 왜곡과 인신공격들이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방송계 '가짜 프리랜서' 관행에 철퇴
이들을 대리한 강은희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2년이 걸린 게 아니라 12년이 걸렸다"고 고쳐 말했다. "해고된 후 지금까지 2년이 소요된 것일 뿐, 작가들이 2010년 MBC를 입사할 때부터 근로계약서를 썼어야 했기에 이제야 문제가 바로 잡혔다"는 지적이다.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도 "근로기준법은 직업 종류에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한 사람을 근로자라 정한다"며 "대법원은 근로자 여부는 계약 형식이 아닌 실질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판시해왔으며, 그렇기에 방송작가가 프리랜서라는 논리는 근기법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방송계 종사자들은)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정규직 근로자와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는 업무 특성상 여러 단계의 제작 과정과 협업을 거친다"며 "무엇보다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방송사가 최종 결정권자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방송계 비정규직 태반이 방송사 고용 직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대식 언론노조 수석부위원장도 해직기자 출신인 박성제 MBC 사장을 겨냥해 "두 작가를 빨리 복직시키고, 소송 건마다 판단을 받으려 들지 말고 무늬만 프리랜서 문제 자체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언론노동자 선배가 관행이나 시기상조란 핑계로 공영방송의 참담한 현실을 개선하지 않는 것을 언제까지 봐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패소와 관련해 MBC 관계자는 14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아직 정리된 입장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