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변화였을까 아니면 보수층에서 그를 더 이상 반체제 위험인물로 인식하지 않아서였을까, 두 가지의 복합이었을 터다. 1998년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김대중이 집권하면서 그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되면 쉽지 않았던 여러 대학에서 출강이 이루어졌다.
2001년 5월부터 명지대학교 국어국문과 석좌교수에 초빙되어 2004년까지 출강하고, 2004년 7월에 한국종합예술학교 석좌교수, 2005년 봄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 2007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2008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 2013년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를 맡았다.
대학마다 석좌교수에 대한 처우가 천차만별이지만, 대학에 따라서는 상당한 수준의 급료로서 예우하였다. 오랜 지우가 전한 한 사례를 소개한다.
몇 해 전에는 그가 대구에 와서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과 나를 만나자 해서 잠시 만난 적이 있는데 그게 그와의 가장 최근의 만남이다. 용건은 그가 당시 심취했던 '율려운동'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는데, 나는 지금 하고 있는 농사살림의 한살림운동만으로도 힘에 벅차서 그 어려운 율려운동은 못하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했었다.
그때 그는 농담인지 자랑인지 내게 자기가 "지금 명지대학 문예창작과에 한달에 한 번 특강을 하고 3백만원의 월급을 받는 석좌교수라는 것을 하고 있는데 배 아프냐"고 했다. 나는 "천만에, 김지하 시인이라면 그만한 사회적 대우를 받고도 남을 만큼 공로도 있고 실력도 있는데 왜 내가 배 아파 하겠느냐? 축하할 일이지"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진심이다. (주석 5)
그는 치열한 저항과 긴 옥고, 감시와 따돌림 등 힘겨운 삶을 영위하면서 그리고 잦은 이사와 잠행을 거듭하느라 경제적 궁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김 시인의 경제적 사정은 어떠했던가? 그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다. 그는 <월간조선> 90년 5월호 인터뷰에서 "현재 가장 아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돈이죠. 돈이 별로 없어요(허허). 애들 좋은 것도 사주고 싶고 우선 먹고 살 방도가 있어야 하니깐요. 이제까진 인세로 그럭저럭 버텨왔는데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뭔가 벌이를 해야 할 텐데.…… 쓸 수 있는 돈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나이에 집 한 칸은 장만했어야 하는데, 아직도 전세라니 말이 됩니까. 전세가 오를 텐데 걱정입니다." (주석 6)
우리 독립운동사나 민주화운동사를 읽다보면 그들은 이슬먹고 사는 초인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들의 투쟁방략, 이데올로기, 활동 등은 자세히 기록한 데 비해 어떻게 먹고 입고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소략하거나 건너뛰기 마련이다.
김지하 역시 가족을 둔 가장으로서 생계 문제가 어려웠을 것이다. 2000년대에 몇 대학의 석좌교수를 맡고, 저서에 금서의 딱지가 풀리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김지하 시인에 대해서도 그의 생명사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말고 그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문인들의 생계 문제에 대해 얼마나 미친 척 하는 몰인정한 사회인지 그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거대 신문들이 문인들과 인터뷰를 하면서도 문인들에게 인터뷰료를 지불하기는커녕 '널 홍보해줬으니 고맙게 생각해라'는 식으로 뻔뻔하게 나오는지, 그런 '착취' 시스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다. 나는 김 시인이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신문에 왕성한 기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신도 알게 모르게 저널리즘의 얄팍한 속성에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본다. (주석 7)
주석
5> 천규석, <김지하의 '유목 - 농경문화 통합론'에 대하여>, <녹색평론> 2005년 11~12월호, 6~7쪽.
6> 강준만, <10년 후의 삶을 사는 김지하>, <인물과사상> 제6권, 75쪽, 재인용.
7> 앞의 책, 74~7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