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폭우는 기상관측 이래 115년 만에 최대 폭우로, 분명히 기상이변인 것은 맞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기상이변은 이변이라 할 수 없다. 언제든지 최대, 최고치를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 윤석열 대통령, 10일 '폭우 피해 상황 점검회의' 모두발언 중
이처럼 2차 피해 최소화 등을 역설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집중 호우를 "115년 만의 최대 폭우"라 공식사실화 했다. 숫자 및 수치에 민감한 언론 보도와 달리 대통령의 워딩은 신중함이 요구된다. 8일 일일 최대 강수량을 두고 언론들이 설왕설래를 벌인 것은 사실이다.
서울, 역사에 남을 기록적 폭우... 115년 만? 100년 만? 80년 만? - 9일 한국일보
서울 하루 강수량 115년만에 최다…"공식 기록은 아냐" - 9일 매일경제
이 기사들은 강수량 보도의 기준이 된 기상청 시스템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 기사들이다. 현재 공식 강수량은 종로구 송월동 옛 기상청 자리에 있는 서울기상관측소 측정값을 기준으로 한다. 8일 언론들이 쏟아낸 일일 최대 강수량 기준은 동작구 신대방동에 위치한 기상청 관측소 기준이다.
기상청이 9일 언론 브리핑에서 "비공식"을 전제로 "역대 가장 많은 양으로 판단"한다고 밝힌 것도 그래서다. 이날 방재기상관측(AWS) 기록에 따르면, 기상청 관측소의 8일 강수량은 381.5mm였다. 언론들이 다수 인용한 측정값이다. 반면 서울기상관측소 기준 일일 강수량은 129.6mm였다. 이 모두 기상청 기상자료 개방포털에서도 확인 가능한 자료다.
불신 부추긴 정부 대응과 언론 보도
10일 구독자 53만을 보유한 한 유튜버가 윤석열 대통령의 "115년만의 폭우" 발언을 비판하는 내용의 영상을 게재했다. 해당 유튜버는 "중부 지방에 폭우로 피해가 잇따르자 언론과 윤석열 대통령은 '115년 만의 최대 폭우'라며 불가항력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라며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기상청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서울의 대푯값인 서울기상관측소의 강수량은 지난 8일 하루 129.6mm, 시간당 최고 38.1mm로, 하루 강수량은 2022년 6월 30일 176.2mm, 시간당 강수량은 2021년 7월 19일 65.7mm보다 적었습니다. 결국 사전 대비와 초기 대응 미흡으로 '무정부 상태'라는 비판까지 나오자 데이터를 왜곡해 불가항력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유튜버는 대다수 언론들이 기준 삼은 기상청 관측소 관측값 대신 서울기상관측소를 기준 삼았다. 의도했든 사실 확인에 미흡했든, 다른 기준을 적용한 셈이다. 해당 영상은 만 하루가 안 돼 38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소셜미디어 등 인터넷 상에서도 널리 공유됐다.
11일 오후 기상청 기상자료 담당자에게 관련 사안을 직접 확인한 결과 "이번처럼 집중적인 호우가 개별 지역마다 다르게 내린 경우 서울기상관측소와 기상청 관측소 측정값도 다를 수 있다"며 "(신대방동 강수량 등 기록적 폭우) 관련 보도들은 기상청 공식 방재기상관측(AWS) 기준이지만 공식 집계 기준은 서울기상관측소 기준이 맞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존 언론 보도와 다를 바 없는 설명이었다.
윤 대통령의 "115년 만의 최대 폭우"가 비공식 집계를 바탕으로 한 워딩인 건 맞지만 '데이터 왜곡' 수준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해당 유튜버의 주장이나 높은 조회수 모두 기존 언론 보도와 대통령과 정부의 폭우 피해 대응에 대한 불신이 뒤섞인 결과라 할 만 했다.
일부 언론보도가 그런 불신을 부추긴 측면도 없진 않다. 대표적인 것이 이상민 행안부장관 도착 '예정' 속보다.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모르게 정부의 늑장대응을 역사에 기록한 꼴이 됐다.
<뉴스1> 등 일부 통신사 및 종합지 들은 8일 밤 10시 이후 <이상민 행안부장관 10시 30분 도착>과 같은 속보를 연이어 보도했다. 제목만 보면 이 장관이 세종청사에 도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뉴스1>의 포털 기사 송고 시각은 '22:08'. 즉, 이 장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착 '예정' 상황을 알린 일종의 예고 속보였던 셈이다.
이러한 속보 관행은 따옴표 저널리즘, 받아쓰기 보도와도 연결됐다. 9일 오전 윤 대통령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가족 3명 사망 사고 현장을 둘러 본 뒤 '하천 수위 모니터 시스템' 개발 등을 지시했다. 대통령실의 관련 서면브리핑 내용을 고스란히 옮긴 기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천 수위 모니터 시스템' 개발 지시가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받아들여질 만 했다.
이날 오후 하천 수위 모니터 시스템이 6년 전 이미 개발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반된 논조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러자 대통령실은 "큰 하천의 경우 일부 수위 예측 시스템이 있지만 이번에 범람한 도림천처럼 지류, 지천에는 수위 예측 시스템이 없다"는 내용의 추가 해명자료를 냈다.
소셜미디어 및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선 재반박이 이어졌다. 기록적 폭우로 국민들의 관심이 정부 대응에 집중된 상황에서 받아쓰기 보도와 대통령실 브리핑 및 해명이 혼란과 불신을 가중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보도들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좋은 보도'보다 쉽게 눈에 띄는 '나쁜 보도'들
"아크로비스타 지하주차장도 물에 잠겨 자동차들이 침수됐다는 피해 제보가 잇따랐다. 온라인에는 아크로비스타 내부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영상이 공유되기도 했다." - <윤 대통령 서초동 자택 주변 침수…새벽까지 전화로 상황 챙겨>, 9일 <조선일보> 기사 중
이날 오전 <조선일보>를 비롯해 여러 매체가 관련 내용을 보도하며 윤 대통령 자택이 위치한 서초구 아크로비스타 아파트 내부 엘리베이터가 침수된 동영상 캡처 사진을 게재했다. 관련 동영상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를 모으면서 일부 언론이 확인을 거치지 않고 기사 속에 해당 영상을 캡처한 사진을 인용한 것이다.
이날 오후 <오마이뉴스> 보도로 해당 영상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관련 기사 :
윤 대통령 자택 엘베에서 물이?... 관리사무소에 물었더니 http://omn.kr/206xs). 11일 현재 <조선일보> 기사 속 온라인 영상 사진 및 기사 내 사진을 설명한 문장은 삭제된 상태다. 아울러 '전지적 대통령 시점'의 기사도 있었다.
"당초 윤 대통령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을 방문하는 등 현장에서 현황을 보고 받고 대책을 강구할 방침이었지만 주변 도로가 막혀 갈 수 없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윤 대통령은 헬기 이동도 검토했으나 심야 주민 불편 등을 고려, 포기하고 결국 자택에서 밤을 새워가며 상황을 지휘 했다." - <구멍난 하늘, 밤 지샌 윤석열...도로 마비에 자택서 상황지휘>, 9일 월간조선 온라인 판
"발만 동동 구르던 윤 대통령"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8일 소위 '서초동 현인'이라 불리며 소셜미디어과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군 폭우 피해 남성을 범죄자로 둔갑시킨 매체도 있었다. <위키트리> 보도였다.
"서울 폭우 속 침수된 차량 위에 앉아있던 남성 정체가 알려졌다. 알고 보니 이 남성에게는 '범죄' 혐의가 있었다. 이 사건은 서울 마포구에서 벌어졌다. 지난 8일 서울 서초구 도로 침수로 고립된 제네시스 차량 운전자와는 무관하다."
해당 피해 남성은 이날 오후 퇴근길 양재동 사거리에서 침수된 본인 차량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진을 트위터에 게재해 화제를 모았다. <위키트리>는 '서초동 현인' 관련 언급량이 온라인 상에서 급증하던 시각 마치 피해 남성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소위 '클릭 장사'를 유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유례없는 사망자를 속출시킨 폭우와 재해에도 '클릭 장사'에 여념이 없는 일부 매체들의 불신을 자처하는 보도는 계속됐다. 속보 경쟁이나 클릭 유도를 위한 단발성 기사는 기본이었다.
정부 해명을 두고 'vs'와 따옴표를 강조하며 사실 확인보다 논란이나 대결 구도를 강조한 기사도 여럿 눈에 띄었다. 독자들의 눈엔 '좋은 보도' 보다 '나쁜 보도'가 더 눈에 쉬이 뜨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