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친일파'를 오늘날과 같은 의미, 즉 '자기 일신과 일족만의 영달을 위해 일본 침략자들에게 부역하면서 동족을 괴롭히는 자'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한 건 을사늑약 이후, 특히 1907년 고종 양위와 군대 해산 이후였다.
'친일파'라는 단어에 토왜(토착왜구)·매국노·민족반역자·사익 지상주의 모리배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문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됐고 해방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았다. 일차적인 이유는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로 새로운 대일 관계 위에서 친일 개념을 재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일에 결부된 온갖 부정적 의미가 과거의 망령이 되지 못하고 현존하는 권력으로 남았으며, 일제강점기의 반민족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의식이 지배적 지위를 점했다.
글로벌 시대에 '친일'이라는 단어가 욕으로 쓰이는 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엘리트들이 과거 반민족 행위자들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리고 대중의 눈에 그런 사실이 보이는 한, 친일파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조선 이후 일제 병탄과 쿠데타, 민주화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역사는 친일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의 싸움이었다. 친일세력이 해방 후에도 헤게모니를 쥐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는 계속 왜곡되고 변질됐다. 친일세력은 이승만 독재 세력으로 이승만 독재 세력은 군사쿠데타 세력으로 IMF 경제 위기를 초래한 세력으로 이어진다.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는 역사는 광복을 맞은 지 77년이 된 오늘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2011년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9명의 친일인사 중 최소 76명이 현충원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11년이 지난 2022년 이 숫자는 더 늘어나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
이 중 60명이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을 진압한 김백일(서울현충원)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김창룡(대전현충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60명 중 박정희 정권에도 참여한 사람은 31명이다.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신상철, 여수‧순천 사건의 진압작전에 참여했고 한국국방연구원장을 지낸 송석하,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국방장관을 역임한 유재흥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거친 사람들
전두환 정권에까지 가담한 친일인사는 8명이다.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백낙준과 최장수 대법원장 기록을 가진 민복기,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판사를 지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민복기는 박정희 정권 당시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인혁당 사건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이어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백선엽은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해방 후 6.25 전쟁에 참전해 후에 육군참모총장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교통부장관을 역임했고 민간기업체 사장 등을 거쳐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한 후,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활동했다. 민복기와 백선엽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현충원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에 이어 제6공화국인 노태우 정권까지 가담한 인사도 안장돼 있다.
정일권은 박정희 정권하 외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될 때 민주공화당 의장을 맡았다. 1980년 신군부의 집권 이후 제5공화국의 국정자문위원을 지냈고 제6공화국에서는 한국자유총연맹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김정렬은 일본군 항공 대위 출신으로 4.19혁명 당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임기 초기인 1988년에는 제19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정일권, 김정렬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된 고재필도 노태우 정권까지 영욕을 누렸다. 육군 준장 출신인 그는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는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을 지냈다.
제77회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는 국가보훈처 주관 '17위 한국광복군 유해 안장식'이 진행됐다. 대부분이 젊은 나이에 순국해 국립묘지로 이장을 신청할 후손조차 없어 지금까지 서울 도봉구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묘소에 안장돼 있던 순국선열들이다.
대대로 영예로운 삶을 누리다 사후에서마저 대접받아온 친일파들과는 달리, 살아서 고단한 삶을 살아온 독립군들은 죽어서조차 안식을 누리지 못했던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