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디자이너는 생활 속 아이디어로 일상의 불편을 해소하는 사람, 혼자 고민하기보다 함께 이야기하고 궁리하는 사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희망제작소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소셜디자이너들을 만났습니다. [기자말] |
오호진 명랑캠페인 대표는 소셜디자이너계의 '왕언니' 혹은 '원조 소셜디자이너'라 할 만하다. 영화·공연 기획자로 15년간 일하며 <친구>(2001), <말아톤>(2005) 같은 흥행작을 제작한 회사에 다니고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발레리나 강수진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협업하던 그는, 돌연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2013년 사회적 약자를 응원하는 기업 '명랑캠페인'을 설립했다. 희망제작소가 공공영역에 관심 있는 시민들을 위해 마련한 사회혁신 입문프로그램인 '소셜디자이너스쿨(SDS)'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미혼모, 경계선지능청소년, 자립준비청년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캠페인에 탁월한 감각을 발휘해온 그를 두고 언론에서는 '나눔기획자'라 지칭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리추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곤 하는데, 기실 오 대표는 창업 이래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온 탄탄한 주식회사로 명랑캠페인을 일구어왔다. 오호진 대표를 지난 9일 만나 인터뷰했다. 다음은 이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소셜디자이너들 만나 열린 새로운 세상... 영화 <말아톤>에서 힌트를 얻다
- 소셜디자이너스쿨(이하 SDS)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소셜디자인을 업으로 삼으셨습니다. 잘나가던 문화예술 기획자가 사회적기업 창업을 결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만큼, SDS 외에 다른 배경이 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SDS 강연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나 신선하고 충격이었어요. 당시 공연기획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저는 내 것을 나눈다거나 누군가를 함께 이롭게 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소셜디자이너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협동조합이라든지 사회적기업 같이, 10여 년 전에는 너무나 생소한 개념이었는데 당시에도 이미 해외는 물론 국내에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웠어요. '나도 좀 다르게 살아볼까' 하는 생각을 처음 했지요. 이후 희망제작소에서 마련한 인생이모작 준비 프로그램인 '퇴근후렛츠'에 참여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새 삶을 준비하게 됐어요.
그런데 창업을 하더라도, 전혀 해본 적 없는 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결국 문화 콘텐츠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야 할 텐데, 생각해보니 제가 이전에 영화 <말아톤>이 흥행하면서 자폐스펙트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인 경험도 있고, 해외입양을 소재로 한 <마이파더>라는 영화를 만드는 데도 참여한 적이 있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확장하고 이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클래식 공연기획자로 일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진행한 경험도 도움이 됐어요. 엘시스테마는 빈곤층 아이들의 음악교육과 자립을 위해 출범한 오케스트라인데, 그곳 출신인 세계적인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청소년 단원 100명, 오케스트라를 만든 호세 아브레오 박사를 초청해 공연했거든요. 그동안 세계 최정상 아티스트들과 일했고 훌륭한 공연도 많이 봤지만, 엘시스테마 연주는 그에 비할 바 없이 감동적이고 힘이 넘쳤어요.
가난한 아이들에게 큰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저와 주변인 인식이 공연을 통해 한순간에 바뀌었습니다. 문화콘텐츠가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 깨달았던 당시의 감동이 명랑캠페인을 설립하는 데 또 하나의 배경이 됐던 것 같아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막 창업을 하고 있었어요.(웃음)"
- 명랑캠페인을 설립하고 제일 처음 한 일이 미혼한부모 입법캠페인입니다. 미혼모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연극 <미모되니깐>을 공연하면서 국회 입법 활동도 함께하셨지요. 결국 2017년 한부모가족지원법 제정, 2018년 양육비 관련 법 개정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셨어요. 이후 환경미화원 안전캠페인 '서로행복', 정신장애 바로알기 캠페인 '마음see',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비바씨' 등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하셨는데, 대표님이 평소 관심이 있었던 사회적 이슈에 주목하신 결과인가요?
"아니요, 제가 워낙 귀가 얇아서 생긴 결과입니다(웃음).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준비하면서 현재 서울 상암동에 있는 장애인재활병원 건립 기금 마련 콘서트를 기획했어요. 가수 션 씨를 비롯해 관심 있는 아티스트들이 출연하는 대규모 콘서트를 세 차례 진행했는데, 예술의전당이 전석 매진될 정도로 호응이 컸고 덕분에 기금도 많이 모았죠.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완성도 높은 문화예술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건 공연예술 기획자로서 늘 해왔던 일이지만, 공연을 통해 사회적 가치 창출하는 데는 또 다른 기획력과 마케팅 전략이 필요했고 세 번의 나눔 콘서트를 통해 이 부분을 배울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됐어요.
그 후 명랑캠페인을 설립하고 나니 주변에서 지켜보던 분들이 여러 제안을 해주셨어요. 그중 미혼한부모 입법 캠페인은 청소년 미혼모들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해 관련 입법을 목표로 (사)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와 미혼한부모 당사자 분들과 동고동락하며 5년 가까이 진행했지요.
실제 미혼모들과 연극의 진행을 도울 전문 배우가 무대에 올라 관객과 소통하는 토론연극 <미모되니깐>을 상연하며 전국을 다녔어요. 당사자들의 진정성을 담은 콘텐츠가 얼마나 큰 정서적 환기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국회에서 토론회가 열리는 날에는 현장에 참석해 미혼한부모들의 현실을 전하고 입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애초 목표대로 법이 제정됐으니 저 개인으로서나 회사로서나 큰 보람과 족적을 남긴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동안 명랑캠페인이 진행한 프로젝트 중에서 환경미화원 안전 캠페인이나 정신장애 바로알기 캠페인 등은 의뢰를 받은 경우고, 저의 개인적인 관심에서 시작한 캠페인은 현재 진행 중인 경계선지능청소년을 위한 캠페인과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프로젝트들이에요."
청소년 미혼모 만남 뒤 '양육비 법개정' 성과까지... 보호종료아동에 관심지닌 계기
- 시설이나 기관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면 독립해야 하는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에 특히 관심이 많으신 듯합니다.
"미혼한부모 캠페인을 하면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입양되거나 시설에 입소하는 과정도 지켜보았죠. 시설에 입소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별 준비 없이 사회에 나가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살아가야 해요. 그 아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2019년 '꽃길만'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콘서트 역시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던 소이프라는 회사의 의뢰로 시작했어요. 가수 션씨가 관심을 보여 함께했고 팬층이 두터운 뮤지컬 배우들을 대거 섭외해서 콘서트가 성황리에 진행됐는데,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규모 있는 행사로는 처음이어서 관심을 많이 받았어요.
콘서트가 끝난 후 션 씨가 국내 기업에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장기적인 지원사업을 제안했다면서 사업 기획을 맡아달라고 연락해왔어요. 기획에는 기꺼이 참여했는데, 막상 진행하려니 저희 회사가 감당하기엔 규모가 크고 사업의 성격도 조금 달라서, 다른 곳과 함께하시도록 제안드렸죠.
저희는 저희대로 '꽃길만' 콘서트를 만들면서 만난 자립준비청년들과 공연을 보거나 캠프를 하는 등 일상 속의 재미난 일들을 기획하며 인연을 이어갔어요. 그러다 이 개성만점 친구들의 독립생활 분투기를 담은 웹툰을 만들어보자 싶어 2020년 6월부터 인스타툰
<독립, 만 18세>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내친김에 자립준비청년을 응원하는 캐릭터 브랜드 '비바씨프렌즈'(VIVASEE friends)를 론칭하고 션씨를 비롯한 연예인들과 아이들이 출연하는 관찰예능 프로그램 <비바로그>를 제작해 유튜브 채널 '
비바씨'에 올려놓았고, 비바씨 캐릭터 '퐁' '꿍' '얌'을 모티브로 40여 종의 굿즈를 출시해 판매도 하게 됐어요.
요즘은 개별 만남과 행사보다는 좀더 근본적으로 문제해결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독립을 준비 중인 청년 15명에게 주택청약저축통장에 매달 10만 원씩 24개월 납입해주고 있어요. 회사 재정으로, 일종의 사회공헌처럼요. 관심 있는 독지가 한 분의 도움도 있어 앞으로 55명까지 지원을 늘려나갈 계획이에요. 또 음악을 전공한 자립준비청년들이 꽤 많은데 코로나19 때문에 연주 기회가 없고 생계도 막막하잖아요. 그래서 자립준비청년 연주자들을 아동양육시설에 음악교사로 파견해 레슨하는 사업도 하고 있어요."
- 자립준비청년 지원을 위한 콘서트가 웹툰과 인터넷방송, 캐릭터 상품 판매, 주거와 생계지원까지 확대된 셈인데요. 여러 지원을 많이 해서 이 사업으로 수익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말씀드린 자립준비청년 프로젝트는 명랑캠페인의 사회공헌 사업이라고 할 수 있고요, 수익은 공공영역의 문화예술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과 비바씨프렌즈 상품 판매로 내고 있어요. 올 상반기에도 기아대책 콘서트를 맡아 진행했고요, 지역 축제와 행사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도 많이 받아요.
명랑캠페인이 만드는 문화예술 콘텐츠의 특징은 '스토리'에 있어요. 자립준비청년들의 스토리를 웹툰으로, 캐릭터로 녹여냈듯이, 지역 축제 또한 그 동네의 스토리를 녹여내는 게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저희가 신촌을 소재로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신촌에는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가 있잖아요. 각각을 대표하는 노래를 꼽아보니까 연세대는 노찾사의 <그날이 오면>, 이화여대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상>, 서강대는 무한도전의 <그대에게>더라고요. 세대도 장르도 다 다르죠.
그래서 이 세 곡을 모티브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을 만들었어요. 광장이 없고 좁은 골목만 있는 명지대 앞에선 가게 사이사이 담벼락을 활용한 '담벼락 축제'를 기획하고 동네 버스커들을 모아 시간대별로 공연을 했고요. 공간과 사람이 모이면 이야기가 되고, 여럿이 함께하는 이야기에는 힘이 있어요. 소셜디자이너는 이야기를 만들고 모으고, 전달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 대표님처럼 소셜디자인을 업으로 삼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으실까요?
"소셜디자이너는 다른 이의 삶을 긍정적으로 참견하고 응원하는 사람이고, 또 응원을 받기도 하는 사람이에요. 주변에 저를 칭찬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저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거고요. 그러니 누군가를 응원할 마음이 있어야 이 일을 할 수 있겠죠.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남을 응원하며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수익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비전이 없으면 책임감 있게, 꾸준히 일을 해나갈 수 없으니까요."
-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를 들려주세요.
"우선은 비바씨 캐릭터를 잘 키우고 잘 파는 게 목표고요(웃음), 좀 장기적으로는 자립준비청년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어요. 베네수엘라의 '엘시스테마'처럼. 그렇게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는 거죠,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나요?"
덧붙이는 글 | *인터뷰 및 정리: 희망제작소 미디어팀. 해당 글은 희망제작소 홈페이지(www.makehope.org)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