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제 갈 시간이야. 얼른 나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 아들은 바닷물에서 나올 줄 몰랐다. 몇 번을 소리 내어 불러도 답이 없길래 결국 포기하고 아내와 짐을 챙겨 숙소로 돌아왔다.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은 모습으로 아들은 우리 앞에 나타났다. 화장실 너머로 들려오는 샤워기 물소리를 들으며 아내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한 달 전쯤 동네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 학부모로, 아내들끼리 먼저 알게 된 후 아빠들도 친해져 형동생 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형은 아는 지인을 통해 강원도 양양의 바닷가 앞에 펜션 예약이 가능하니 함께 가자고 했다.
아이들도 여름방학 시기라 딱 좋았다. 다만 사춘기에 허우적대는 아들이 문제였다. 일단 가족과 상의하고 답을 주기로 했다. 아내와 딸은 당장이라도 떠날 듯 기뻐했으나 예상대로 아들은 시큰둥했다. 하지만 친구도 간다고 하니 금세 마음을 바꾸었다. 형에게 얼른 연락을 취했다.
여행을 가기로 한 전날 아들의 친구는 우리 집에서 자기로 했다. 낮과 밤이 바뀌어 집에서는 도저히 아침 일찍 일어날 자신이 없다는 형의 말에 공감이 되었다. 아들도 방학을 맞이해서 밤늦도록 게임을 하느라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
과연 둘이 일어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밤새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에 가보니 갈 준비를 다 한 것이 아닌가. 놀라서 물어보니 못 일어날까 봐 밤을 새웠다고 했다. 맙소사.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5시간이 넘어서야 강원도 양양에 도착했다. 아들과 친구는 내내 차 안에서 잠을 잤다. 숙소는 정말 바닷가 바로 앞에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갔다. 딸은 한 살 언니인 아들 친구 동생과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들이 어떨지 궁금했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알아서 하겠지 하며 나도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보드라운 모래가 발바닥에 닿으며 마음마저 평온해졌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아들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아들과 친구가 맞았다.
물속에서 서로 물 뿌리며, 씨름도 하고 어찌나 재밌게 놀던지. 순간 아들이 맞는지 내 눈을 의심했다. 평소 남처럼 여겼던 동생에게도 다가가 장난도 치며 잡기 놀이를 했다. 나는 수영하다가 힘이 들어 파라솔 아래서 휴식을 취했는데, 아들은 물에서 나올 줄 모르고 친구와 동생들과 물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약한 패들보드와 서핑 강습도 불평 없이 받았고, 제트스키와 땅콩 보트까지 타며 원 없이 놀았다. 바닷가에 나와서는 친구와 모래 놀이를 하며 쉴 틈 없이 계속 놀았다. 표정은 또 얼마나 밝던지. 늘 찌뿌둥한 얼굴만 보다가 밝은 햇살 가득한 모습을 보니 낯설었다. 옆에서 나와 같이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 아들이 저렇게 잘 노는 아이였어?"
"그러게……. 저렇게 잘 놀 줄이야. 이런 모습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참."
저녁 때가 되어도 밥 먹을 생각도 없이 물 속에서 나올 줄 몰랐다. 결국, 다음날 일찍 오기로 한 계획도 취소하고 늦게까지 놀 수 있도록 했다.
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놀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여행 기간 아들이 진심으로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매일 방 안에만 갇혀 게임을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놀 수 있는 장은 만들어주지 못하고 잔소리만 늘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밤늦게까지 학원에 다니며 결국, 할 수 있는 놀이라고는 게임밖에 없었던 것을. 며칠 전 회사 후배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 마음 아팠다.
회사 후배는 이번 인사로 우리 부서로 발령받았다. 초등학교 때 캐나다로 유학을 하여서 대학까지 나오고 한국에 돌아왔다. 같이 밥 먹을 때 그곳의 학생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때까지도 오후 3~4시면 수업이 끝나서 친구들끼리 잔디밭에 둘러앉아 이야기하거나 스포츠를 즐긴다고 했다. 특별히 사교육도 없어서 늘 놀 궁리한다는 말이 신기했다.
그에 반해 어릴 때부터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제대로 놀 시간조차 없는 우리 아이들이 불쌍했다. 물론 캐나다와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은 다르다. 굳이 대학에 갈 필요성을 못 느끼고, 직업교육을 받고 기술직에 종사하려는 학생들이 많다는 후배의 말을 빌려서도 그 차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만 대학을 선택하면 한국에서의 교육열 이상으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말에 부러움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부터라도 놀 궁리가 필요하다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에서 인상적인 회가 있었다. 배우 구교환이 '방구뽕'이란 인물을 맡아 학원 버스에 아이들을 태워 숲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부모님 동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미성년자 납치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놀 기회를 박탈당하고, 좁은 학원 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드라마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유일한 놀잇거리인 스마트폰 게임이나 영상에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점점 자극적으로 흘러가는 콘텐츠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정신 건강이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막을 수도 없는 게 딜레마였다. 그러기에 어린이 해방총사령관 '방구뽕'이 한 말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합니다. 나중에는 늦습니다.
대학에 간 후, 취업을 한 후, 결혼을 한 후에는 늦습니다.
불안이 가득한 삶 속에서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찾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나역시도 지금부터 우리 아이가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지 궁리를 해야겠다. 그깟 영어 단어나 수학 문제 하나 덜 풀어도 괜찮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기에 마음껏 놀며 마음 안에 즐거움을 새기도록 하는 것이 부모 된 나의 도리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