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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은 북쪽으로 경주, 동쪽으로 울산, 서쪽으로 밀양과 청도, 남쪽으로 양산과 부산이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언양 인근 지역은 언양으로 인재들이 몰려들고 또한 인재들이 지역으로 되돌아가 활동하였다.
▲ 1914년 언양 인근 지역 지도 언양은 북쪽으로 경주, 동쪽으로 울산, 서쪽으로 밀양과 청도, 남쪽으로 양산과 부산이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언양 인근 지역은 언양으로 인재들이 몰려들고 또한 인재들이 지역으로 되돌아가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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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시대 언양의 북쪽에 두서면과 두동면이 있고, 서쪽에 상남면과 하북면이 있으며, 남쪽에 중남면과 삼동면이 있었다. 동쪽에는 범서면과 울산읍이 있었다. 언양의 북쪽은 언양보다 경주와 생활권이 가깝고 한때는 경주 지역이었다. 언양은 이 지역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사방 지역은 마을이 분산적이었다.

삼동면의 민중교육과 소년단체

삼동면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인 농촌지역으로 궁벽한 빈곤한 면으로 여러 시설이 불완전한 상태였다. 더구나 소년의 앞길을 개척해줄 만한 단체도 없었다. 하지만 지역유지들은 교육에 관심이 많아 1923년에 강습회가 금곡리 낙영의숙, 둔기리 진명강습소, 둔기리 둔기의숙 3개가 있었고, 출강리에 노동야학이 있었다. 야학보다 강습소가 많았다는 것은 제한적이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1920년 간송 신진걸(澗松 辛鎭杰, 1893~1941)은 둔기의숙(芚基義塾)을 열어 6년제 공립보통학교 과정에 다시 2년제 고등학교 소학교 과정을 병설하였다. 정규사범 학교 출신인 손영기(孫永基), 정태관(鄭泰觀)과 동래고보 또는 일본전문학교 출신인 김수태(金洙泰), 강경회(姜慶會), 김세도(金世道) 등의 우수한 교사진을 구성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써 영민한 수재를 육성하였다. 특히 그 시대에 있어 마련하기 어려운 광활한 금잔디 축구장을 조성하여 거국적인 경기에도 손색이 없는 운동장을 갖추었다. 1927년 삼동공보가 신설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삼동면 대암댐 수몰지역에 둔기의숙이 있었음을 알리는 둔기리 비석(좌측)과 간송 신진걸 선생 추모비(우측)
▲ 삼동면 둔기의숙 기념비 삼동면 대암댐 수몰지역에 둔기의숙이 있었음을 알리는 둔기리 비석(좌측)과 간송 신진걸 선생 추모비(우측)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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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초에 교사 이방우가 주간에는 1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고, 야간에는 성인 대상의 야학을 운영하며 교수하였다. 최종적으로 문을 닫은 시기는 1929년 3월이었다. 울산시장 신선열, 울산시 교육장 이병직,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도 둔기의숙 출신이다. 둔기리는 현재 1969년 대암댐이 만들어져 대부분 수몰되었다.

1923년 5월 31일 삼동면 둔기리(屯基里) 진명(進明)강습소와 삼동면 금곡리(金谷里) 낙영의숙(樂英義塾)이 연합 대운동회를 진명강습소 운동장에서 거행하였다. 궁벽한 농촌인 삼동면에는 초유의 성황이었다. 1923년 12월 중순에 삼동면 출강리 지역유지 차경철(車景轍), 정한기(鄭漢基), 정성락(鄭成洛) 등의 발기로 노동자 30여 명을 모집하여 3명이 명예교수(敎授)로 야학을 신설하였다. 울산군 삼동면 조일리에 마을유지 정재순(鄭在順), 김승태(金昇泰), 신진철(辛振喆), 김진효(金振孝) 등 여러 명의 활동으로 1926년 2월 하순부터 교사(校舍) 건축공사에 착수하여 가까운 시기에 강습소 허가원을 제출하여 4월 중순에는 개교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교육 운동에 힘입어 삼동소년단이 1924년에 창립되었다. 삼동면은 원래 궁벽한 농촌이고 제반 시설이 불완전하여 소년의 앞길을 개척해줄 만한 소년단체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마을유지들이 삼동면 사촌리 천[도]교회에서 50여 명의 소년군으로서 삼동소년회를 조직하였다. 1924년 7월 30일부터 10일간 삼동면 각 마을에 순회소인극을 통해 소년회의 취지를 알렸다. 일반 부형(父兄)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였으며 동정금이 보은리, 조일리, 금곡리, 하잠리, 사촌리, 출강리, 하작리, 둔기리, 작동, 중리 10개 마을에서 총 89원 20전이나 되었다. 삼동소년회는 1926년 5월 30일 '언양소년소년연맹'의 제1회 정기대회에 참가하였고, 1932년 만주동포 구호금품 기부활동을 하였다.

두서의 교육운동과 소년단체

두서면 인보리에 두북강습소(斗北講習所)가 있었다. 두서면장 손석권(孫錫權)과 마을유지 장만환(張萬煥), 정태진(鄭泰鎭), 이석찬(李錫贊), 임창선(林昌善) 등의 노력으로 수년 전에 설립하여 아동을 교육하였다. 1923년 여름(夏期) 이후로는 학교 운영 경비의 곤란으로 매우 비운에 빠져서 일반의 우려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1923년 11월부터 두서면 서하(西河), 내와(內瓦), 전읍(錢邑), 미호(嵋湖), 인보(仁甫)의 5개 동리(洞里)에 있는 국유지 소작인들이 수년 전부터 국유지소작인조합(國有地小作人組合)에 저축하였던 금액 6백여 원을 상당한 신용처(信用處)에 취리(就利, 돈‧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얻음)하여 그 이자의 반액을 두북강습소에 보조함으로 강습소 당국자들은 매월 소액의 금전이나마 감사히 경비에 충용하고 있다. 현재 아동 40여 명을 교양하는 송정호(宋正浩), 임창선(林昌善) 두 사람은 명예적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 두북강습소의 강사인 임창선은 1900년생으로 두서면 인보리 출신으로 언양공보 4회 졸업(1918년 3월)을 하였다. 두서면 인보리 출신으로 언양공보 13회 졸업하고 두서소년단원으로 활동한 장영호(1915년생)의 부친이 강습소 발기인 장만환이다.

두서면 구량리 보신강습소는 1920년에 유지 김원집(金元集) 외 수명의 열성으로 창립되었다. 그 이후 적지 않은 난관을 돌파하고 문화 향상에 많은 공헌이 있었다. 김원집(金元集, 1863~1953)은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를 지냈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연루되어 큰아버지 부경공을 따라 중국 청도로 망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두서면의 2대와 5대 면장을 지냈다. 1904년 미국 선교사 에드윈 맥파랜드[맹의와, 孟義窩]의 영향을 받아 울산 지역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도를 하여 1906년 1월 29일 두동면 천전교회 건립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나라를 찾기 위한 후진 양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학문 교육 기관인 보신학원을 설립하였다. 보신학원은 당시 구량 인근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어 차리·천전·반곡·다개·평리·서하·인보·전읍 등 구량에서 가까운 마을의 젊은이들이 와서 교육받았다. 이 학교는 당시의 신학문인 국어·산수·역사·지리를 가르쳤다. 1924년 현재 소장(所長) 김원집, 교원 장근덕(張根德) 김차곤(金次坤), 회계 권석동(權石同) 등의 열성과 학부형들의 후원으로 60여 명의 학동을 교수하고 있다.

두서면 서하리에 거주하는 허찬(許濽)은 원래 기독교 독신자이었다. 그전부터 유야무야 중인 서하리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의 부진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23년 9월부터 지역유지들의 동정금을 얻어 유지비로 삼고 노동야학을 계속하였다. 장소는 서하리 기독교회당을 정하고 자기가 직접 교편을 잡아 남녀생도 40여 명을 가르쳤다.
두서지역의 소년운동 단체는 [인]보소년단과 구량소년단으로 1926년 이전에 창립되었지만, 그 활동이 창립 이래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잔천(殘喘) 상태에 있었다. 1926년 5월 30일 '언양소년소년연맹'의 제1회 정기대회에 두서소년단과 구량소년단이 참가하였다. 

상북면의 교육운동과 소년단체

일제강점기 울주군 상북면 지역은 민중교육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주학(晝學)으로 운영된 강습소는 상북사립 진명학원, 양정학원, 석남사 강습소, 지내 강습소, 유신강습소 등 5곳이었다. 야학(夜學)은 긍근정 우만야학, 궁근정야학, 양등야학, 궁평야학, 길천야학, 지내야학, 산전야학, 지화야학, 명촌 사광야학, 명촌야학, 등억야학, 거리야학, 천전야학 등 13곳이 있었다.

1919년 9월에 상북면에 가장 먼저 생긴 강습소는 '상북 사립 진명(進明)학원'이다. 1919년 9월에 이규장(李圭章)이 설립하였고, 당시 생도는 60명이었으나 1929년 1월 현재 30명으로 교장은 이무용(李武鎔)이다. 이규장(李圭章, 1892~1940)은 울주군 상북면 거리 출신으로, 1919년 언양 3·1운동 이후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22년 귀국하였다. 천도교인 이규장은 1923년에 양정학원 설립에 참여하고, 강사로 활동했다. 1924년 결성된 시대청년회의 집행위원이었다. 1925년에 결성된 상하북노동야학연합회의 집행위원, 울산사학회와 울산과학회 창립 임원으로 간사였다. 1926년 1월 동아일보 울산지국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길천리 노동야학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1919년 서태우에 설립된 야학과 1922년 마을 유지에 의해 설립된 야학이 그것이다. 전자는 진명학원과 연결되지만, 설립자 이름이 다르다. 서태우에 의해 설립된 길천리노동야학은 1929년까지 1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서태우(徐泰祐)는 가계(家計)가 본래 풍족하고 여유가 있지도 않으면서, 자기 개인 일로 바쁨에도 불구하고 제반 주선에 끊임없이 노력하며 매일 밤 출석하여 학생의 강습상황을 일일이 자세히 살폈다. 1925년 12월 1일 길천리 야학회 창립 제6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규천(李圭千)의 취지 설명과 남녀학생의 창가가 있었고, 여흥으로 극까지 거행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천도교도가 주축이 된 야학이었다.

1921년 봄에 양정강습소가 생겼다. 면장 이규상 외 김석한, 김찬희, 김형한, 김우경, 이규화, 김규천 등의 열렬한 노력으로 1922년 봄에 상남면 거리에 있는 천도교당을 빌려 양정강습소[양정의숙, 양정학원]를 설치하였다. 양정학원은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고 지역유지들이 후원금을 기부하여 설립되었다. 지내리의 성충갑, 양등리의 김석한, 등억리의 김찬희가 큰 기부를 하였다. 당시 사설강습소 허가를 받아 운영한 학교로, 교실 2칸과 관리실 1칸의 건물이 있었다. 양정학원의 교육방침은 신지식 함양, 애국애족 애향심 함양, 건전한 개척정신 함양 등이었다. 강사는 휘문의숙 출신의 이무종과 이규장으로 이들은 언양 만세운동 주동자들이었다. 장소는 현재 거리 양정학원 유허비 북쪽 작은 소나무 숲이고, 천도교 마을회관은 유허비 느티나무 옆의 공터였다.
상북면 궁근정리에는 유신강습소, 우만마을 야학, 강산소년화 야학, 궁근정리 야학 모두 4개의 야학교가 있었다. 1924년 동아일보는 궁근정 노동야학에 대한 사설을 다음과 같이 실었다. 노동자, 농민이 만들지 않은 것이 없는 현재 주인인 그들에게 한글 교육이 필요함을 이념을 떠나서 강조하고 있다.

"궁근노동야학 - 사람의 졸던 눈을 뜨게 하는 소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글'이다. 그들에게 글을 주라. 글을 주라! 글을 주지 아니하고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농부와 모든 노동자에게 '가갸거겨'를 주라! 그리하면 그 '가갸거겨'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오늘날의 학교와 신문잡지와 모든 서적은 거의 전부가 선민계급의 독점이요. 그것이 있게 한 주인이 되는 농민이나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의 땀으로 입고 먹는 선민들에게는 그 은인이요, 주인인 그들에게 적더라도 '가갸거겨'를 갚아줄 의무가 있을 것이다.

빈부를 등별(等別)하여 전곡(錢穀)을 연출하여 유지비를 삼아가면서, 조선어, 한문, 산술, 일어 등을 배우려 하는 경남 울산의 궁근정에 사는 '빈궁'한 동포들을 생각해 보라. 

노동야학이 금일에 시작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금일에 더욱 긴요한 것은 사실이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나 그 무엇임을 막론하고 진실로 조선인을 사랑하는 자일진대 빈궁한 동포들에게 '가갸거겨'를 주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는 것이 그들의 사업 기초인 까닭이다."


언양과 가까운 상북면 지내리에는 1923년 12월 정태관, 정태균 두 사람의 발기로 지난 1923년 12월 중순부터 해당 마을 빈집을 무임차입(無賃借入)하여 가정상 빈곤이나 혹은 입학난으로 인하여 보통학교에 통학치 못한 인근 동리 아동 40여 명을 모집하여 운영하였다. 또 더욱 비참한 경우에 있는 노동계급에서 배우고자 하나 배우지 못하는 동포를 위하여 노동야학부를 설치하고 두 사람이 주야를 불원하며 열성으로 교수하였다. 낮에는 무산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주학을 하다가 저녁에는 노동계급(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부를 개설한 것으로 짐작된다. 지내리 강습소의 설립자이자 교사였던 정태균은 1926년 북남농민조합 집행위원이었다.

현재 영남산무리[알프스] 입구 마을인 상북면 등억의 노동야학은 192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25년 등억노동야학회를 설립하고, 1927년 신진노동교육회를 조직하여 야학을 후원하였다. 등억야학교 교가는 다음과 같다.

"왕방산이 우뜩 솟아 구름 맺히고/오봉산에 폭포수는 웅장하도다./ 좌우에 칡덤이 둘러서 있고/ 바라보니 작괘천에 물이 흐르네."

등억 노동야학의 설립과 운영의 중추적 역할은 김교홍(金敎洪, 1906~1987)이었다. 김교홍은 등억리 천석꾼 김찬희(金燦熙, 1880~1950)의 둘째 아들이었다. 첫째 아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언양 지국장과 상북면장[1936~1945]을 지낸 김교완[본명 김교철, 1940년 개명]이다. 둘째 아들이 바로 교홍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야학운동을 하고 신간회 언양분회원으로 활동하고, 광복 후에는 민보단 단장, 국민회 부위원장, 언양향교 유림회장[유도회 언양지부의 전신]을 지냈다. 셋째 아들은 일제강점기에 경방단장을 지내고 광복 후에 대한청년단장을 지낸 김교준이며, 넷째 아들은 김교득이다. 김찬희는 자신 소유 재산으로 향내 빈민들이 내야 할 호세(戶稅)를 여러 차례 대신 납부해 주었고, 휼빈소(恤貧所)를 설치하여 가난한 향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1922년 양정학원 1천 원, 1948년 언양중학교 이전 토지 대금 120만 원 등 지역 학교 설립에 많은 기부 하였다. 그의 공덕비가 등억마을 입구에 있다. 김교홍은 1929년 4월 21일 신간회 울산지회 설립 1주년에서 민간교육공로자 표창(民間敎育功勞者表彰)을 받았다.

상북면은 천교도인이 많아 지역적으로 학구열은 높았지만, 마을이 분산적으로 있고, 밀집적 인구가 적어서 마을마다 야학이 있었지만, 소년단체는 적었다. 1924년 4월 하순에 창립한 시대청년회는 '의식계발, 계급타파, 노동본위' 강령에서 보듯이 가장 진보적이고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단체였다. 울산읍 천도교울산소년단의 소년극단(少年劇團)이 1924년 12월 27일 저녁 8시경 언양에서 사회극인 「청년의 개심(改心)」과 종교극 「신생의 날」을 공연하고, 다음날 28일에는 상남면 거리 천도교 교회에서 공연하였다. 소년운동이 천도교에서 발생하여 어린이 해방운동을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북면의 천도교인들은 소년운동에는 연계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년해방보다 계급해방을 우선시한 듯하다.

상북면 지역의 소년운동단체는 상남소년단(1926), 궁근정 강산소년회(욱선소년회, 1926), 지내리의 헌남소년단(하북소년단, 1927) 3개로 언양과 중남면보다 늦은 1926년 이후에 창립된 듯하다. 이 소년단들은 야학 운동과 연계된 소년단체였다.

언양 밖 지역에 야학을 통한 지역유지들의 교육 운동이 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운동이 빈곤한 이유는 소년운동을 지도할 지도자가 없었고, 또한 소년운동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소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운동은 어른에 의해 이끌려가는 운동이 아니라 소년/어린이 자신이 주체적 존재로 성장하면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운동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다소 배운 소년들이 있어야 했고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했다. 아직 공립보통학교가 없는 궁벽한 농촌지역의 소년운동은 곧 그 지역의 한계였다.
 상북면(상남면, 하북면)은 천도교인과 지역유지를 중심으로 가장 활발한 민중교육이 일어났지만, 소년운동은 활발하지 않았다.
▲ 일제 식민시대 상북면 민중교육 운동 지도  상북면(상남면, 하북면)은 천도교인과 지역유지를 중심으로 가장 활발한 민중교육이 일어났지만, 소년운동은 활발하지 않았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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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언양소년운동, #울산소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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