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수업시간에 전쟁소설을 가르치다가, 윤석열 대통령의 북한 선제타격론을 비판했던 경기지역의 한 자율형사립고(자사고) 교사에 대해 교육지원청이 중징계를 요구한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징계 사유로는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 위반' 등이 제시됐지만, 해당 교사는 "인류 보편의 가치인 평화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대통령 발언을 소재로 활용한 것도 죄가 되느냐"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24일 경기도교육청 산하 안산교육지원청이 지난 6월 중순쯤 작성한 '성실 의무, 품위 유지의 의무 위반 A고교 B교사 중징계(정직 1월) 요구' 문서를 입수해 살펴봤다. 이 문서는 지난 6월 20일 A고교에 전달됐다.
안산교육지원청 "교사의 정치 중립성 의무 위반"... 중징계 요구
해당 문서에서 안산교육지원청은 "교사 B는 5월 17일 A고 3학년 심화국어 수업시간에 사회적으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사상과 정치관, 특정 인물에 대하여 자유롭게 토론하거나 객관적 입장에서 양쪽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면서 "교사의 주관적 가치 판단에 기초한 정치적 발언을 함으로써 교원의 정치 중립성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 대통령이 특정 인물을 연상시키는 행동을 하는 정치 풍자 만평을 수업자료로 사용함으로써 학생 민원을 유발하고 다수의 언론에 보도되는 등 대내외적 민원을 유발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안산교육지원청은 B교사의 수업 중 발언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되기 전에는 선제타격 얘기했지만(중략) 그냥 본인은 선제퇴근하시고(후략)."
"대한민국 보수의 품격, 늘 전쟁 안보 팔이 하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내빼기 있죠. 그리고 그 자식들, 안보 떠드는 놈들, 그런 놈들이 언론 보수적인 애들이거든요. 언론사 자녀들 다 병역면제, 이런 거 놀아나지 마시라는 말이에요."
"지금 권력 잡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짓들이 그렇지. 그냥 사람을 갈라치기 하고, 이제 조금이라도 자기 세를 갖다가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 이런 반지성주의가 판치고 있고(후략)."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안산교육지원청은 "교원의 정치적 중립성 등 법령을 준수하며 성실히 직무를 수행해야 할 성실의 의무를 위반했다"면서 "수업 중 속된 표현을 사용하고 본 사안으로 다수의 언론에 보도되는 등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한 B교사에 대해 중징계(정직 1월) 처분을 요구한다"고 지시했다. 비슷한 논란을 겪은 다른 시도교육청의 처분에 견줘 더 높은 수위의 징계를 요구한 것이다.
이 같은 징계 요구서를 받은 A고는 지난 7월 26일 교원징계위를 열었고, 지난 8월 18일 '감봉 1개월' 징계통보서를 B교사에게 보냈다. B교사가 2016년 교육감 포상을 받은 데다 '성실하고 능동적인 업무처리 과정에서 생긴 과실로 인한 비위'로 판단해 징계를 감경한 것이다.
A고교 문서를 보면 학교는 B교사에 대해 "교과전문성이 뛰어나고 소신을 갖고 생활하며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하여 지도한다"고 평가했다. B교사의 2021학년도 근무성적은 100점 만점에 98점으로 높은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A고교, 감봉 1개월로 감경... 해당 교사 "평화는 보편 가치, 억울하다"
안산교육지원청의 중징계 요구에 대해 B교사는 <오마이뉴스>에 "부당한 요구이기에 억울하다"라고 밝혔다. B교사는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을 가르치면서 인류 보편의 가치인 평화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 당시 언론에 많이 오르내린 윤 대통령의 '대북 선제타격론'을 얘기한 것"이라면서 "교육청은 토론방식 수업을 하지 않아 정치중립성 훼손에 따른 성실의무 위반이라고 중징계를 요구했지만,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는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쟁적 사안이 아니라고 봤다"고 반박했다.
B교사가 수업에서 다룬 소설은 박완서가 쓴 <겨울나들이>다. 이 소설엔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인물들의 삶이 담겨 있다.
B교사는 일부에서 제기한 '선거법 위반' 주장과 관련해서도 "해당 수업자료는 이미 지난 4월 중순경에 모두 만들어 EBS 교재에 나온 <겨울나들이>를 가르치는 시간에 맞춰 활용한 것"이라면서 "당시 내 문제를 선거에 활용한 것은 오히려 국민의힘과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아니었느냐"고 되물었다.
이 교사는 "나는 지난 5월경 윤석열 대통령만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실패한 부동산 정책, 서민을 힘들게 한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수업 중에 비판 목소리를 균형 있게 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참고로, 경기도교육감 후보 시절 임태희 경기교육감은 B교사 수업 논란을 일부 언론이 보도하자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5월 29일 '이념화된 학교'란 제목의 시리즈 홍보물을 만들어 선거전에 활용했다. 임 교육감은 당시 '중도·보수 교육감 후보 연대' 대표를 맡고 있었다. 임 교육감은 당시 보도자료에서 "이번(B교사) 사건은 경기 교육의 이념화되고, 편향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맹공을 퍼붓기도 했다.
"수업 내용 일방적인 주장 담아... 안산교육지원청의 자체 판단"
안산교육지원청 관계자는 24일 <오마이뉴스>에 "해당 교사에 대한 징계 요구는 윤 대통령을 비판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중립성을 어겼다고 봤기 때문"이라면서 "수업 중 전쟁이 발생하는 요인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내용을 학생에게 제시하지 않았고, 내용도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담은 것이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다른 교육청과 달리 과도한 징계 수위가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징계를 최종 결정한 게 아니라 학교에 중징계를 요구한 것일 뿐이며, 이 과정에서 경기도교육청에서 다른 언질을 받지 않았고 우리가 자율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