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지난 6월 14일 대전지법 229호 법정. 민사21부 구창모 부장판사가 재판 종료 직전 휴대전화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심리 중인 사건의 원고가 적어 온 입장문이었다.
판사는 막 입장문 낭독을 끝낸 원고에게 "잠시만 이 자리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조서에 넣을 건 아니다. 어떤 마음에서 온 지 알겠으니, 참고만 하려고 한다. 최대한 신속히 결정내겠다"고 말하며 5분 가량 진행된 심문을 끝냈다.
원고는 국내에 해외 물자를 조달하는 무역회사 피지코리아의 대표 A씨. 미국 거주자였던 그는 판사에게 억울한 사정을 직접 호소하고 싶어 통상 2~3분 내 끝나는 가처분 신청 심문기일임에도 불구하고 왕복 200만 원 비행기 표를 끊고 입국했다.
A씨는 조달청과 강원테크노파크(아래 강원테크노)에 입찰 과정의 부당성을 호소하다 결국 지난 5월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올해 1월 게시된 강원테크노의 '열간등압소결기' 설비 외자(외국산 물품) 입찰에 응했고 부적합 판정을 받았는데, 판정 기준이 통상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에
'낙찰자는 우리 업체가 되는 게 맞다'는 낙찰자 지위 확인 소송을 내면서 기존 계약을 정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함께 낸 것.
그리고 8월 1일 A씨 주장이 전부 인용된 가처분 신청 결과가 났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A씨 신청에 이리 답했다.
"조달청·강원테크노 주장은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외환부족으로 '구제 금융'과 함께 '자율권 박탈'이란 굴욕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우리가 소중한 외화를 낭비하면서 시쳇말로 '국제적 호갱'이 될 필요는 없다. (중략) 부적합 판정이 정당하지 않은 이유는 차고 넘친다. 입찰 전문가인 조달청이 왜 이렇게 해석하고 제도를 운용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 높은 규격에 단가 낮은 업체가 경쟁에서 탈락
열간등압소결기는 아르곤 등의 기체로 고온·고압을 만들어 금속 분말을 결합하는 소재 공정 설비다. 우주, 항공, 방위산업, 반도체 산업 등에서 사용될 수 있게 밀도 높은 소재(소재 고밀도화)를 만드는데 흔히 쓰인다.
입찰을 조달청에 요청한 강원테크노는 산업계, 학계, 정부 및 지자체 등의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 창업을 발굴·육성하고 사업화하는 공공기관이다. 2000℃ 이상의 고온, 2000bar(2억 파스칼) 이상의 고압을 제어하는 규격의 설비가 국내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외자 입찰로 진행됐다.
계약방법은 수의계약이 아닌 일반경쟁에 최저가 낙찰제였다. 규격을 충족한다면 입찰가를 가장 낮게 쓴 업체가 낙찰되는 방식이다. 총 3개 업체가 참가했고 A씨 업체를 포함한 2개 업체만 강원테크노 요구 규격을 충족했다. A씨 측 입찰가는 359만9000달러(47억389만원), 경쟁관계의 B 업체 입찰가는 378만1000달러(49억4176만원)였다. 즉 A씨가 최저가 낙찰대상이었다.
그런데 B 업체가 뽑혔다. 강원테크노가 A씨 업체가 부적합하다고 심사 판정을 했기 때문이다. 규격서 요구사항으로 적어놓은 '고압용기 제조등록증명서'(한국가스안전공사 인증)가 근거다. 외국 고압용기를 국내 수출할 경우 고압가스안전관리법 5조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장관에게 등록해야 하는데, A씨 업체는 이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상한 선택... 판사의 결정문 "무늬만 입찰"
재판부는 가처분 결정으로선 이례적으로 30쪽을 할애해 조달청과 강원테크노를 반박했다. 문제의 등록증명서는 낙찰 후 계약을 맺고 물품을 공급할 '계약자'에게 요구해야지 입찰 단계의 '입찰자'에게 요구할 서류가 아니라는 게 핵심이다.
재판부는 "강원테크노는 고압가스안전관리법 5조를 가장 강력한 근거로 내세우지만 외국업체가 생산한 물품은 한국으로 반입될 때, 즉 통관할 때에야 국내법이 요구하는 소정의 등록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해외 생산 설비를 납기일에 맞추어 납품만 하면 되는데, 누가 낙찰됐는지 알기도 전인 입찰 때부터 등록 증명을 요구하는 건 "모순"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또 "국내 설치 이력이 없는 장비면 국내법상 모든 인정이나 등록이 되기 전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입찰 때 모두 제출케 하는 건 사실상 외자 입찰 포기"라며 "강원테크노처럼 할 경우 미리 정보를 입수해 인증을 해 둔 업체 이외의 신규 업체가 입찰에 참여할 길은 완전히 봉쇄된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A씨는 한국가스안전공사로부터 납품 기일 내에 등록증명서 인증이 가능하다는 답변도 받아 놨다. A씨 업체가 공급하려고 했던 설비를 생산하는 스페인 '하이퍼베릭'은 연매출 700억 원 규모, 전 세계 120여 명 임직원을 둔 기업으로 업계 선두주자 평판을 가진 회사다. 반면 낙찰된 B 업체가 선택한 AIP는 임직원 16명, 연 매출 약 50억 원 규모의 회사다.
'수의계약' 정황 의심
"'무늬'는 입찰일지언정 '실질'은 수의계약."
"자본주의 기반 경쟁 입찰에서 이런 투찰은 낙찰에 관심이 없거나, 낙찰 확신을 넘어 자신하는 경우 둘 중 하나."
"이처럼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게 사실이라면 왜 입찰절차를 진행했는가." (결정문 중)
재판부는 "무늬만 입찰"에 대한 의심을 결정문 곳곳에서 드러냈다. 핵심은 배정금액의 '99.99%'를 기록한 B 업체의 입찰가다.
조달청 배정 금액은 378만1182달러, B업체 입찰가는 378만1000달러. 겨우 182달러(약 22만 원) 차이다. A 업체는 이보다 18만2000달러(약 2억 3787만원)나 적은 금액으로 참여했다. 재판부는 "(경쟁을 통한 효율 등) 외자 입찰 제도 근본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B 업체가 사실상 배정금액 전액으로 응찰한 데 대해 "자본주의 경쟁에서 이런 투찰은 낙찰에 관심이 없거나 낙찰 확신을 넘어 자신하는 경우 둘 중 하나"라며 "낙찰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 텐데 도대체 어떤 연유로 자신들이 낙찰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일까?"라 물었다.
재판부는 강원테크노 측이 입찰 시행 전 조사한 시장조사에도 의문을 나타냈다. "'외국산 기자재 구매 규격·시장조사' 자료에 미국 외 일본과 유럽에도 이 사건 물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제조업체 조사내역'에는 AIP만이 동등 규격 물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처럼 조사결과를 보고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A씨는 'AIP보다 규모가 10배 이상 큰 업계 리더 하이퍼베릭 존재를 (강원테크노 측이)몰랐다고 하는 것은 스마트폰 제조회사를 조사하면서 중국 샤오미는 알았지만 미국 애플은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어불성설'이라는데, 도대체 시장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이런 비난을 받는가"라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현 상황을 유지하면 "심각한 하자를 묵인하고 낙찰자 결정과 계약 체결을 허용하는 것이라서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하는 결과"라며 강원테크노와 B 업체 간 효력을 정지시켰다.
조달청·강원테크노 "재판부 사실판단 다 틀려"
강원테크노 관계자는 지난 22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재판부의 판단 대부분이 사실관계를 틀렸다. 논점 하나하나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의 신청을 준비 중"이라며 "고압가스법령을 준수하자는 것일 뿐이다. 업체가 (규격 충족 및 납품 등에) 실패할지도 모르는데 관련 제조 등록증명서는 필요하고 미리 있어야 (입찰을) 진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수의계약 정황을 의심한 부분엔 "전혀 아니"라고 반박했다.
조달청 관계자도 "가처분 결정에 이의신청을 한 상태"라며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잘못된 사실관계 판단에 반박할 것"이라고 했다. 재판부의 의심에도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며 "추후 법적 대응 과정을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29일 기준 조달청과 보조참가인 강원테크노 측은 아직 재판부에 이의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의신청서가 제출되면 같은 재판부가 심리를 하고 이의 신청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