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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동아일보, 1925.05.01)
▲ 1925년 어린이날 포스터 새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동아일보, 1925.05.01)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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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부터 정치 역사 문화적으로 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 창당(1925. 4)과 카프(KAPF)의 발족(1925. 8)이 있었다. 소년운동단체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 소년운동단체가 1925년 4월까지 220여 개였다.

1925년 경성의 소년단체가 21개로 증가하자 연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25년 5월 24일 반도소년회는 불교소년단과 공동 발기로 의장 정홍교의 사회로 '경성소년지도자연합' 발기총회를 불교소년회관에서 열어, 모임을 가칭 '오월회'라고 하였다. 참가단체는 반도소년회, 불교소년회, 새벗회, 명진소년회, 선명청년회 소년부, 중앙기독교소년부, 천도교소년회 등 12개 단체였다.

단체 명칭은 '경성소년연맹'으로 하고 소년운동을 일치화하고 각 소년회 운동 상황 조사 등을 결의하였다. 강령으로 사회진화법칙에 따른 소년총연맹 체결,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경성소년단체 연결 사업, 상부상조와 인류공영의 시대조류에 따른 소년연맹 달성 등을 추진하였다.
 
1920년대 창간된 소년운동 잡지는 소년운동 황금시대를 이끌었으며, 어린이들은 한글로 편집된 잡지를 읽으면서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해나갔다.
▲ 1920년대 어린이 잡지들 1920년대 창간된 소년운동 잡지는 소년운동 황금시대를 이끌었으며, 어린이들은 한글로 편집된 잡지를 읽으면서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해나갔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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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운동을 단일화하다  

오월회는 5월 31일 창립총회를 열고 연합기관을 '경성소년총연맹'으로 하였다. 중앙기독교회관에서 매월 월례회를 하고 경성 소년단체의 소년문제에 대한 의사를 교환하고 안으로는 소녀의 지도방침을, 밖으로는 소년문제를 선전하고 소년 사이의 친목을 도모함에 의견을 같이하고 임원으로 방정환, 고한승, 정홍교를 선정하였다. 소년운동 단체는 종교적 차이와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고 단일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오월회의 주동자는 서울청년회원, 시천교청년회원이었던 정홍교(1903~1978)였다. 당시 시천교청년회는 특이하게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늘 친좌파적 행보를 걸었다. 정홍교가 속한 시천교 역시 천도교의 한 분파였다. 천도교 이론가들은 서양철학과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느 틀에 속하지 않고, 민족주의도 넘어서면서 독자적 노선을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천도교 구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좌파와 연대했으며 신간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류였던 신파는 문명개화와 실력양성론 등의 민족개량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 사회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 조선농민사를 통한 농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방정환 역시 오월회와 타협적 활동을 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방정환은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를 접하고 이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그가 속한 천도교 신파의 독자노선을 점차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정치 조직의 대립적 정세와 사회사상사적 측면의 미묘한 논리에 의해 방정환의 아동문학은 계급주의 아동문학 논자들로부터 대사회적 현실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민족주의적인 소년운동의 천도교소년회와 계급주의 노선의 반도소년회, 두 단체는 갈등 속에 연합과 분열을 반복하며 오월회를 통해 소년운동을 발전시켜나갔다.

오월회의 첫 사업으로 소년지도자 강습회를 6월 16일부터 10일간 예정으로 열고 강연회도 하기로 하였다. 강습회 강사는 방정환, 소년문제 강연은 고한성이 하기로 하고 준비위원으로 정성채, 정홍교, 이원규 등을 선정하였다. 그런데 9월 15일 총회를 열고 집행위원 임원을 정홍교, 송몽룡, 고장환, 이정호 등 9명을 선임하였다. 방정환이 제외됨으로 오월회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어 공공연히 무산소년운동을 표방하였다. 일제는 경성소년연맹의 명칭을 허락하지 않아 오월회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소년문화운동의 황금기 

소년문화 황금기가 1920년대에 전개되었다. 천도교소년회, 명진소년회 등 많은 소년단체의 창립이 되었다. 그와 함께 각종 소년잡지가 발행되었다. 먼저 <어린 벗>, <조선소년>, <샛벌(개성)>, <반도소년(반도소년회)> 등의 등사판 잡지가 발행되었다. 이것이 경비곤란과 경영자의 무능으로 없어지고 <새벗>, <별나라>, <소년계>, <소녀계>, <무궁화>, <아희생활> 등등의 잡지가 나와 서점에는 어린이 잡지가 넘쳐 날 지경이었다.

또한 소년단체에서 동화회, 동요회, 원유회, 등산회 등을 하고, 봄놀이, 추석놀이, 가을놀이를 하고, 장난감답지 않은 장난감을 가지고 비사삽기, 사방치기, 팽이굴리기, 딱지치기 등을 하였다. 이러한 것은 어린이도 인격체로 보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여성운동이나 형평운동처럼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운동이 아니라 얌전하고 조신한 소극적 운동으로 말하자면 겸손하면서 어른에게 대항하는 정신을 길러왔다. 발을 밟히고 '미안합니다!'와 같이 스스로 겸손하며 그 반성을 촉구하는 듯하면서 강한 무저항주의로써 저항해 왔다.

1920년대 중후반 울산 천도교소년회의 활동

울산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이후 열렸던 어린이날 행사에 울산지역에서 주도적 행사 참가와 관련한 보도가 없었다. 울산천도교소년회는 소년들의 의식개혁과 체력단력, 가극회 등의 계몽운동 연장선의 활동을 주로 하였다.

1925년 6월 5일 저녁 8시 울산천도교소년회에서는 제4회 임시총회를 열었다. 규칙 개정을 통해 회원 중에 다른 단체에 입단된 회원을 정리하면서 지도자를 확실히 하였다. 당시 소년회 지도자가 다른 단체에 중복 가입되어 활동함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천도교소년회의 지도자가 확정됨에 따라, 운동부 지도자 김영배(金英培)는 6월 17일부터 1주일간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1시간 축구법을 강의하였다. 소년의 운동에 대한 지식을 얻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8월 4일 대구소년회에서 무산소년야학기관 설치 모금을 위한 지방 순회 음악무도단을 만들어 울산을 방문하였다. 울산청년회, 울산기독교주일학교, 학성소년회, 울산소년회, 울산불교소년회, 울산천도교소년회, 시대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울산지사가 후원하여 공연은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대구소년회는 언양에서도 공연을 하였다.

울산천도교소년회는 1927년 9월 15일 추석맞이 소년소녀가극대회를 울산청년회관에서 연습하고, 16일에는 병영청년회관에서 공연할 예정으로 열심히 준비하였다. 조선일보 울산지국이 후원한 공연은 우천으로 하루 연기하여 17일 밤에는 울산청년회관, 18일 밤에는 병영청년회관에서 성황리에 하였고 지역 유지들의 의연금도 답지하였다.

1928년 1월 16일 천도교울산종리원에서는 천도교중앙종리원 종리사(宗理士) 이돈화(李敦化, 1884~1950)를 초빙하여 울산청년회에서 대강연회를 열었다. 김문성의 사회로 이돈화의 "수운주의(水雲主義)란"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그는 2시간 동안의 강연에서 "현재 모순된 도덕으로서의 사회의 피폐(疲弊, 지치고 쇠약해짐)를 논하고 민중의 재생할 도는 오직 유기적 결단에 있으며 최수운주의가 그 역할을 하고 있으니 민중은 이에 동귀일체(同歸一體)하라"고 하였다. 이날 강의는 청년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소년회원들도 방청하였을 것이다.

이돈화는 천도교 신파의 이론가로 1920년 월간지 <개벽(開闢>을 창간하여 천도교 교리의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근대적 보급에 기여했다. 1920년 초 오지영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남접의 일원으로 참여한 인물이며 1921년부터 최시형의 장자 최동희와 함께 교단의 지방분권화와 중의제(衆議制) 실시를 요구하는 혁신운동에 앞장섰다가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1922년 천도교연합회를 창설하여 천도교단을 이탈했다. 오지영과 최동희는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단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와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 이돈화였다.

이돈화는 인간해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은 부차적으로 고려했다. 하지만 일제 식민치하에서 인간해방은 식민지 억압과 착취라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 울산천도교종리원에서 신파 이론가 이돈화를 초빙하는 것은 울산천도교 지도자들의 성향으로, 이는 울산천도교인의 입장으로 되었을 것이다. 언양지역이 천도교연합회에 가까웠다면, 천도교울산종리원은 신파에 더 가까웠다. 울산지역의 천도교는 종리원 차원에서 야학을 계속 운영하였으며 그것은 김문성과 안태로에 의해 운영되었다.

1928년 12월 24일 천도교 제삼화(第三和) 교조(敎祖) 의암(義庵) 승통일(承統日) 31회 기념행사가 울산천도교종리원 교당에서 있었다. 오전 11시 김성오의 집례로 기념식을 거행하고, 김문성과 안태로의 기념취지 설명이 있었다. 야간에는 천도교소년회원 70여 명의 축하 여흥이 있었다.

천도교에서는 천일(天日) 4월 5일은 1860년에 최제우가 상제로부터 계시받음을 기린다. 지일(地日) 8월 17일은 1863년에 최시형이 최제우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린다. 인일(人日) 12월 24일은 1897년에 손병희가 최시형으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린다. 도일(道日) 1월 18일은 1908년에 박인호가 손병희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린다. 과거에는 음력을 기렸으나 현재는 날짜 그대로 양력으로 기린다.

1929년 6월 11일 단오날을 맞이하여 울산천도교소년회에서는 울산면 우정동 깐지골 솔숲에서 남자는 각희(脚戲, 씨름)대회를, 여자는 천추(韆鞦, 그네)대회를 열었다. 울산에서는 처음이라 재미있는 행사였고 참가자와 관람자가 많았고 상당한 상품도 있었다.

1929년 8월 18일 울산지역에 비행장공사가 있고 인근에 수리조합 공사가 시작됨에 노동자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노동조합의 필요성이 있어 70여 명이 울산천도교종리원에서 창립대회를 하기로 하였다. 11월 19일 오후 8시에 울산천도교 회관에서 노동문제 연설회가 있었다. 수리조합공사를 앞에 두고 군내 농가 이재민은 물론 울산군 밖에서도 노동자들이 날로 모여들고 있는데 공사 업자들은 임금을 40전에서 70전까지 평균 55전으로 정하였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에서는 노동자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분개하여 일반의 여론을 일으키는 동시에 노동자를 각성시키기 위해 김상언의 사회로 노동문제 연설회가 열렸다. 김문성은 "노동문제와 천도교", 양봉근은 "노동문제의 역사적 고찰", 박병호는 "노동문제의 근본(根本)의(義)"를 하였다.

1929년 11월 울산청년회 결성 10주년 기념식에 울산천도교종리원에서 참가하여 금일봉을 기부하였다. 그런데 1930년 울산군은 울산읍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노동야학 폐쇄명령을 내렸다. 지난 8년 동안 운영하던 야학은 무산아동에게 배움의 터전이었다. "강사가 불온하다"고 하여 김문성이 제출한 인가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70여 명의 무산아동은 배움터를 잃게 되었다. 울산의 천도교는 야학을 통해 무산아동과 여자 교육을 함과 아울러 계몽과 문화교육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 운동을 하였다. 그 운동에 천도교인 안태로가 있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언양소년운동, #울산 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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