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싫증나지 않는 게 영화다. 나이 60 이후엔 노년을 다룬 영화에 꽂혔다. 노년 선행학습에 최고의 교과서랄까. 인생의 가을과 겨울을 사는 동년배들과 선배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 영화 속 인물들의 용기와 비범함에 충격을 받는다. "아, 저렇게 살아도 되는 거였구나. 난 너무 소심하게 살았다니까." 혼잣말을 한다.
1960년대 일본 영화, <꽁치의 맛>은 유튜브에 무료로 떠서 보게 됐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유작이다. 아내와 오래전 사별한 초로의 남자가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내고 홀로 남는다. 극적인 사건은 없다. 전쟁이 끝난 후의 일본, 평범한 다다미 주택 내부와 단골 술집 풍경이 무대다.
한 편의 결혼 이야기를 둘러싼 인물들의 일상적 대화가 담담하게 오간다. 60년 전 일본의 전형적 집안 살림살이나 가정식 백반 상차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엔딩은 딸을 보내고 홀로 남은 쓸쓸함을 수습해야 하는 아버지의 뒷모습. 다가오는 인생의 겨울에 대한 예감이다.
1999년 미국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로드 무비다. 감독은 데이비드 린치. 언어 장애를 지닌 중년의 딸과 함께 사는 73세 엘빈 스트레이트는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보행기를 착용하라는 진단을 거부하고 숙원 사업 해결에 착수한다. 작은 오해로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던 형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허리 병에 노안, 게다가 운전면허가 없다. 그는 낡은 잔디깎이 기계를 개조해 캠핑용 트랙터를 만든다. 소시지와 장작을 싣고 위스콘신주에 사는 형네 집으로 떠난다. 시속 5km의 느려터진 여정에 낯선 이들과의 조우, 밤의 추위가 담담하게 담긴다. 때로 친절한 이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너무 놀라 말을 잊은 형과 껴안으며 영화는 끝난다.
젊었던 시절, 형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지 않았던 그가 느닷없이 길을 나선 이유는 뭘까? 뇌졸중으로 쓰러진 스트레이트에게 미움은 어느새 덧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병은 그가 스스로 갇혔던 감정의 감옥을 빠져나오는 계기가 됐다.
넷플릭스 2017년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을 추천한다. 콜로라도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80대 이웃사촌으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제인 폰다가 나온다. 두 사람은 평소 친하진 않았지만 알고 지내던 사이다. 둘 다 사별했고 아이들을 독립시킨 싱글이다.
어느 날 밤, 예고 없이 그 남자를 찾아온 그 여자, 함께 밤을 보내자는 제안을 한다. 수면 장애로 너무 견디기 힘들어진 노년의 밤을 하소연하며, 그냥 한 침대에서 잠을 자자는 거다. 조금 망설이던 그 남자는 찬성하고 다음날 그녀의 집으로 밤샘 마실을 간다. 점점 친해지는 두 사람, 작은 동네라 금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동반 외출을 감행한다. 결국 이웃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 할머니도 피해 갈 수 없는 게 황혼육아. 그 여자의 이혼한 아들은 싱글 대디로 할머니 육아 서비스를 요청한다. 아무리 남친이 좋아도 할머니의 임무를 뿌리칠 수 없는 그녀, 아들네 집을 오가게 된다. 그녀를 따라다니게 된 그는 그녀의 손주에게 야구를 가르치며 스마트폰 중독을 벗어나게 돕는다.
그녀는 결국 아들네 집으로 이사를 간다. 손주를 더 책임지기 위해서다. 멀리 떨어지게 된 두 사람은 밤마다 전화로 긴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의 베프가 된 두 사람이 굳게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엔딩이 기분 좋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속 로버트 레드포드의 전설적 미모를 기억한다면 나이 든 그의 모습은 좀 놀랍다. 한편으론 꾸밈없어 자연스럽고 우아하다. 남친이나 여친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년의 남사친이나 여사친을 갖고 싶다는 이들이 내 주변에도 적지 않다. 다만 용기가 없을 뿐. 자식들을 포함해 남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영화 속 미국식 용기에 영감을 받는 이들이 생기면 좋겠다.
OTT 왓챠에서 본 4부작 미니 시리즈 <올리브 키터리지>는 강렬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올리브 키터리지로 나온다. 정년퇴임한 수학교사로 메인 주의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에 산다. 약사였던 남편 역시 퇴직했다.
이야기는 올리브의 중년에서 노년까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비춘다. 그녀는 괴팍하고 불친절하며 신경질적이다. 친하게 지내긴 힘들 것 같은 캐릭터. 하지만 올리브의 내면엔 타인에 대한 과묵한 공감과 연민이 있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호기심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행동으로 연결되는 타입이랄까. 30여 명에 이르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의 디테일이 잘 살아있다. 아들의 이혼과 재혼을 바라보는 올리브의 착잡함, 학교 제자들과 동네 사람들의 각종 사건을 대하는 올리브 스타일의 대응에 때로 웃고 때로 배우게 된다.
이야기 속, 그녀의 남편이 홀로 된 젊은 약국 직원에게 품었던 애틋한 감정이나 올리브와 동료 교사의 혼외 로맨스도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아 현실감이 든다. 평범하지만 각자 비범한 일면을 지닌 캐릭터들, 바로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올리브처럼 우린 그냥 오늘을 산다. 때론 불편한 감정의 폭풍우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별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하루를 산다. 젊은 시절, 아직 살아보지 않은 노년은 잉여의 시간으로 보였다. 하지만 60살 이후를 살게 된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여생 같은 건 없다. 남아있는 모든 하루, 우리는 현역의 시간을 산다. 이번 생에서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통과하는 이들이 아프게 체득한 깨달음을 나눠준다. 나이 60이 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오는 병들에 맞서 몸부림치며 늙어가는 이들에게 뜻밖의 지혜를 전하기도 한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보여준다. 쇠락한 육신에도 사랑과 우정이 있음을. 누추한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나이 먹어가면서 걸리기 쉬운 질병 중 하나는 시야협착증. 누구나 자신의 인생 하나만 경험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인다. 영화 속 다양한 관점을 접하는 게 시야협착증의 예방과 치료에 도움을 주는 게 분명하다. 그래, 또 한 번 결심했다. 좋은 영화들을 친구 삼아 앞으로의 날들을 초딩 시절 여름방학처럼 살아 봐야겠어. "Good Luck!"을 내 자신에게 외치며.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