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늦게 잠들었는데도 오전 4시에 눈을 떴다. 추석 당일 아침 차례를 드리기까지 여유가 있어 눈을 다시 붙여도 되건만 잠이 오질 않았다. 모든 제수를 미리 손질하고 진설만 하면 되는데 왠지 모르게 새벽부터 마음이 부산하다.
차를 마시며 잠시 1970년대 초반 우리 집 추석 풍경을 떠올린다. 그때 아버지는 내가 지금 하는 것처럼 추석 차례를 준비하며 추석을 맞았다. 식구들은 아버지 따라 제주를 올리고 제례를 지냈다. 차례상 병풍에는 내게 조부모 되는 어르신 영정사진 대신 지방(紙榜)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례를 마치자 아버지는 우리에게 수고했다며 상을 물리라 지시했다. 나는 뜬금없이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지 않고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는데 왜 차례를 지내는지 따져 물었다. 그때 아버지는 당돌한 내 물음에 특별한 말이 없었다.
당시 북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은 귀향할 곳이 없어 이렇게 추석을 보냈다. 갓 대학에 입학한 나는 쓸쓸한 아버지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염장을 질렀다. 그리고 이런 추석 분위기는 대를 이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추선 연휴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심란하다. 이산가족 후손으로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70여 년 세월이 흘러도 실향세대의 귀향 염원은 후손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다.
추석 목전에 제기한 이산가족 문제, 씁쓸한 이유
지난 8일,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북한당국에 남북이산가족 회담을 제의했다. 남북 간 생사확인, 서신교환 및 수시상봉 등 이산가족의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장 가능한 모든 방법을 활용하고 장소와 시기는 북한에 일임한다는 취지도 덧붙였다.
그러나 대다수 이산가족은 권영세 장관의 제안이 반갑지 않다. 따지고 보면 회담 제의는 늘 같은 어조이고 예전의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이 호응할 리도 만무하다.
가뜩이나 추석연휴를 코앞에 두고 회담 제안이라니, 이산가족에게 변죽만 울리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추석 밥상에 화젯거리를 추가하고 이산가족을 정치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일부 비판도 면하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산가족 메시지도 빈말에 불과하다. 이 문제를 최우선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새 정부가 지난 정부와 달리 이산가족 문제에 전향적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역시 공허할 뿐이다.
통일부 장관이 회담을 제안한 이날은 41회 이산가족의 날이다. 민간단체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추석 이틀 전인 8일을 이산가족의 날로 정해 오래전부터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이날 통일부 장관은 이북5도청 행사장을 찾아 이산가족들을 위로 격려했고, 통일부와 적십자는 이산가족을 위로하는 덕담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의례적인 행사가 아닌 이산가족들이 실감하는 획기적인 조치가 절박한 시점이다.
이산가족의 날 국가기념일 제정 서둘러야
이산가족의 날 국가기념일 제정도 하세월이다. 2013년 19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됐지만 폐기됐다. 20대 국회도 시간을 끌다 폐기하고 말았다.
21대 국회도 이산가족의날 기념일 제정안을 계류하고 있지만 통과 가능성은 희박하다. 국회 스스로 이산가족을 위로하고 지원하는 국내법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북 간 이산가족상봉 제안은 한낱 허구일 뿐이다.
2000년 8월 시작한 이산가족 상봉 실적도 초라하다. 이산가족정보시스템 교류 일지에 보면 28회에 걸친 상봉행사(7차례 화상상봉포함)를 통해 3000여 명이 상봉했다. 이는 이산가족 신청자의 2.28%에 불과하다. 내 주변에도 상봉을 신청한 실향민이 많지만 선정돼 상봉의 꿈을 이룬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모두 상봉을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셨다. 2018년 8월 금강산 이산가족상봉 이후 상봉문제는 겉돌고 있다.
이산가족 유관단체들이 추산하는 700~800만 명 정도의 이산가족에 비해 상봉신청자는 13만여 명에 불과하다. 이 숫자는 2017년 이후 답보상태다. 추가신청자가 더는 나타나지 않고 고령자들이 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청자의 고령화로 2016년 2월부터는 사망자가 생존자를 앞지르고 있다. 그럼에도 이산가족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고 국민적 공감대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산가족등록현황에 따르면 이산가족 신청자는 올 8월 현재 13만 3654명, 생존자는 4만 3746명(33%), 생존자 중 80세 이상 고령자는 2만 9035명으로 66.4%다. 이들은 6·25전쟁 당시 10~20대 젊은이들로 실향의 아픔을 직접 경험하고 증언해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돌아가시면 이산가족 개념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신청자뿐 아니라 미신청자 다수도 북한에 좌우되는 상봉행사에 더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반증하기 때문이다.
이산가족들에게 자부심 심어주는 대한민국
아직도 이산가족의 정체성을 숨기는 사람이 많다. 자신을 드러내놓지 않는 것은 그만큼 실향민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고 정체성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후계 세대들도 이산가족과 평화통일에 예전에 비해 관심이 적은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남북문제로만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부는 이산가족들에게 희망 고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상봉을 기대하게 하는 자체가 이산가족을 우롱하는 것이다.
이산가족에게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부심을 심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절실하다. 무엇보다 이산가족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이산가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안에서 실향민을 직접 위로하고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시야를 밖으로 돌려 헤어진 가족과 고향을 찾는 '귀향권'과 '가족권'을 인류보편적 가치로 삼고 유엔에서 이산가족 해결을 모색하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남북이산가족은 남북한을 떠나 인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이산가족 해결은 더는 미룰 수 없을 정도로 시급하다. 이 문제를 지연하다가는 대한민국과 이산가족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지 모른다. 가족 재회의 시간이 돼야 할 추석 연휴가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