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다해 덕을 쌓는 사람이란 뜻의 최덕진 어르신을 가을 햇살이 눈부신 지난 7일 만났다.
지난해 82세 연세임에도 아차산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으셨고, 지난 8월에는 서산시로부터 봉사부문 표창패를 수상하신 선생은 "나이 들었다고 집에만 계시는 분들이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12살 어린 나이에 6.25 사변을 맞은 최덕진 선생, 국민학교를 중퇴하고 난 후 나무꾼이 됐고, 새끼를 꼬아 팔면서 형제들과 자식들을 챙겨나갔다.
"그래도 태어날 적에는 나도 참 귀염둥이였어. 형님과는 스무 살 차이거든. 20년 만에 아들이 태어났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셨다지. 그런데 크면서 풍파를 맞으니 천덕꾸러기가 됐지 뭐.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지.
가장 부러운 것은 중학교 모자 쓰고 학교 가는 거였어. 그게 부러워서 하모니카를 불었지. 가장 슬펐던 것은 친구 엄마가 농사꾼과 놀지 못하게 했던 거였어. 하기야 이제는 다 지난 일이기도 하지만 말여.
이제 남은 인생, 후회 없이 즐겁게 살려고.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하모니카로 즐거운 음악을 들려주고 힘든 사람에게는 노래로 마음을 풀어주려고. 비록 내 나이 산수(傘壽, 80세)를 훌쩍 넘긴 여든셋이지만 그래도 열정은 누구보다 많거든."
- 지난해 아차산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으셨습니다. 혹시 소싯적부터 노래를 좋아하셨습니까?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세요.
"음악은 좋아했지만 살기 바빠서 할 겨를이 없었어. 나는 서산시 양대리에서 태어나 83년을 살았어.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었지. 여태 농사지으며 사는 거야. 조부모, 부모님에 이어 대대손손 농사꾼의 삶을 살고 있어.
소농의 집안에서 이래저래 죽고 4남매가 살았어. 무척 힘든 시절이었지. 내 나이 12살에 6.25 사변이 일어났어. 피난 갈 새도 없었지. 형님은 남의 집에 부역 갔다가 좌익으로 몰려 행방불명됐어. 아무리 찾아봐도 어디로 갔는지 찾질 못했어.
설상가상으로 순경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형님 찾아내라고 소리치더니 결국 부친마저 트럭에 실려 나가 행방불명 돼버렸어. 시체도 못 찾고 그렇게 어머니 혼자 자식들을 책임져야 했지.
그 당시는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던 세월이었어. 동란이 일어나면서 학교도 그만둬야 했지.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그저 마음이 찡햐."
- 혼자의 몸으로 어머니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며 자식들을 키워내셨을까요. 또 선생님은 어떻게 사셨어요?
"어머니가 길쌈을 잘하셨거든. 밤이고 낮이고 지독하게 일만 하셨지. 모친 덕분에 밥숟가락은 들 수 있었어. 그렇지만 국민학교 5학년 책까지 다 사다 놨는데 아버님도 행방불명되시고, 형님도 행방불명되다 보니 학교에 다니질 못했어. 그때는 그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지.
그때부터 어머니가 준 용돈을 조금씩 모았다가 하모니카를 샀어. 학교 가는 친구들이 부러우면 스트레스 푸느라고 하모니카를 불었어. 내가 버틸 수 있었던 돌파구가 악기였지.
집에서는 엄두를 못 냈어. 어머니가 아주 엄했거든. 일만 하는 걸 좋아하신 분이지. 다른 것에 정신 팔리는 걸 상당히 싫어하셨어. 그러다 보니 낮에는 일하고 밤에서야 산 위에 올라가 몰래 숨어 늦은 시간까지 하모니카를 불곤 했어.
아침이면 친구들이 학교 가는 모습이 싫어 피해 다녔지.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슬쩍 비켜 가며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어. 그렇게 살았어. 학교 가고 싶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던 10대 시절이었지."
- 한창 예민할 나이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 당시 상처받은 일이나 잊히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마음에 송곳이 되어 찌르는 게 있지. 당시 중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어. 그런데 자주 놀지를 못했지. 친구 어머니께서 '농부 하고 학생 하고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어울리지 못하게 한 거야.
가까운 곳에 쭉 살았는데도 함께 있는 걸 그 어머니에게 들키면 막 야단했어. '농부랑 놀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던 밤에는 눈물이 그치질 않더라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 어쩌면 내 서러움에 겨워 더 그랬을지도 몰러.
그도 그럴 것이 내 남동생이 세 살 먹어서 뜨거운 난로 위에 손을 퍽 짚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그 시절에 살갗이 여린 동생의 손이 어땠겠어. 체중을 실어 짚었으니... 병원이나 약국이 변변찮게 있나. 어머니가 내 동생 업고 다니면서 치료를 했는데도 안되더라고. 동생은 아프니까 손을 오므리고. 그게 굳어지더라고.
내 동생이 공부를 참 잘했어. 서산중학교 수석 졸업을 했지. 그때부터 동생이 내겐 희망이었어. 동생만 잘 되면 그게 힘들게 산 보상이라고 생각했어. 공주사대부고를 졸업했고,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지. 손으로 하는 일은 못 하니 머리로 벌어먹게 해준다고. 그거 공부시킨다고 속 모르게 울기도 많이 울었어."
- 논 1000여 평으로 도저히 학교를 못 가르쳐서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커서까지 계속 새끼꼬기를 했지. 외지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계속 (새끼) 팔고 그랬지. 그래도 다들 공부도 똘똘하게 잘하더라고. 그 와중에도 심심하면 하모니카도 불고 했어.
내 나이 스무 살에 태안이 집인 아내와 결혼했지. 어머니가 나 군대 가면 혼자 생활해야 하니 입대하기 전에 결혼을 시켜야 한다고 서두른 모양이여.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새색시를 모친에게 맡기고 입대했어. 보고 싶다고 올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그래도 어머니와 같이 의지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느냐고 마음은 놓이더라고(웃음).
그런데 어느날 선임이 나를 호출하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당시 서울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근무했는데 외사촌이 아프다고 하면 안 내보내 줄까 봐 그렇게 말했던가 봐. 놀래서 그길로 서산으로 내려왔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데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더라고.
그길로 어머니를 안고 이틀 동안 앉아만 있었어. 회한이 일더라고. 그동안 얼마나 아픈 세월을 사셨으면 위암이 다 생겼겠어. 우리 어머니가 불쌍해서 물 한잔을 삼킬 수가 없었지. 너무 불쌍한 삶을 사셨잖아.
사랑하는 남편과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됐고, 똘똘한 아들 하나 화상으로 장애인이 됐고. 어디 제정신으로 사셨겠어? 거기다 국민학교도 졸업 못 한 아들은 자식과 아내를 떠나 군대에 가 있지.
남들처럼 마음껏 먹고 웃지도 못한 우리 어머니가 너무 가엾어서 내리 안고 있어도 힘든 줄도 몰랐어. 어머니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 멀쩡한 모습 보고 입대했는데 하루아침에 돌아가시게 생긴 서러운 어머니였어.
내 얼굴 보려고 기다리신 건가 봐. 이틀 만에 돌아가시더라고. 그때가 음력 5월 15일이었어. 따뜻한 봄 날씨였지. 바람도 간간이 불고. 언덕 위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묻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
그렇게 아내와 젖먹이 아들을 어머니 떠난 집에 남겨두고 나는 다시 군대로 돌아왔지. 남은 시간을 무슨 정신으로 보냈는지 몰러. 지금이야 전화도 있고, 통신도 발달했지만 그때는 그게 어딨어. 그냥 온종일 걱정으로 시간만 보냈지.
시간이 약이란 말이 맞더라고. 전역을 했고, 5남매가 태어났어. 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지더라고. 살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스쳐 지났지. 고생만 하던 내 아내도 결국 젊은 나이인 48세에 5남매를 두고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어."
- 아 그러셨군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서산시종합사회복지관에 다니면서 인생이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막둥이가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일 때 48세인 애들 엄마가 대장암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고 허무하게 가더라고. 원이라도 없게 수술했던 것이 그만 마지막이 됐어.
온 식구가 힘들게 살았어. 아무리 혼자 왔다가 결국 혼자 가는 거라지만 참 억울하더라고. 사는 동안만이라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덜 억울했을 거야.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막막한 건 다 마찬가지였을 거야. 아이들이 살아야 했던 이유였어. 그럭저럭 살아냈어. 나중에는 먼저 간 아내몫까지 합해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러던 차에 서산시보를 보게 됐어. 복지관에서 민요반을 운영한다는 거야. 알고 보니 이미 동네 아주머니들도 다니고 있더만. 그때부터 안종미 선생님께 노래를 배웠지. 또 라인댄스 반에도, 대중가요 반에도 등록해서 배우고. 그러고 보니 노인대학에도 다녔네(웃음).
처음 들어갈 때는 느낌도 모르고 무작정 배웠어. 그곳에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지. 집에서 일하다가도 그날이 오면 여지없이 막 가고 싶더라고.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과 친목회도 만들어 같이 관광도 하면서 즐겁게 생활했어."
- 제12회 아차산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민요 부분 명창부 대상을 받으셨습니다. 원래 소리를 하셨는지요.
"어릴 때는 친구들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노래했는데 그때도 잘한다고 하더라고. 전에도 동네 사람들이 나더러 잘한다고 했고(웃음).
올해로 민요 배운 지 11년 차인데 마음 비우고 배우다 보니 이런 좋은 기회가 오대. 안종미 선생님이 (국악경연대회) 출전을 권유했지. 아니면 내가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하겠어.
나는 민요를 하고 안 선생님이 장구 치고. 안 떨리더라고. 아무래도 가르치는 선생님이 워낙 편안하게 해주다 보니 그랬던가 봐. 그게 대상이었어. 최고령 나이에 대상이라니. 날개가 있다면 날아갔을 거여(웃음). 우리 애들도 '고맙다' '멋지다'라고 아주 좋아하더라고.
민요를 배우면서부터 집에서도 혼자 앉아서 장구 치며 노래도 해. 노래방 기계도 한 대 사놓고. 우리 애들이 오면 여전히 '아버지 잘한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해. 아마도 혼자 있다 보니 늘 걱정했나 봐. 부모가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나는 자식들에게 힘이 된다고 봐."
- 지난 8월 남다른 애향심과 봉사정신으로 주민복지증진에 이바지한 공이 크시다고 표창패를 받으셨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잊혀가는 우리의 전통 가락을 노래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봉사도 하니까 기분이 참 좋아. 더구나 일상의 소소한 스트레스까지 다 풀리니 내가 혜택을 봐도 너무 많이 본 건데 그것도 모자라 상장까지 주니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어.
나는 말이여. 나이가 들었는데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특히 어르신들이 '저 사람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노인들은 행복한 권리가 있거든. 지금의 대한민국도 따지고 보면 어르신들이 각자 맡은 곳에서 열심히 살아낸 덕분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거 아녀. 나는 말여. 나이가 들어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어.
일부 어르신들은 '이제 그만 죽어야지'라고 독백처럼 말씀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퍼. 이제는 절대 그런 말 하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했으면 싶어."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시조 한 지는 한 5년 됐나. 대중 앞에서 노래하고 박수받을 때마다 하늘을 날아오를 듯이 기뻐. 이 나이에 내가 이렇게 무대에 설 줄은 꿈에도 몰랐잖아.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즐기면서 하는 일에는 장사가 없지. 지금도 나이 들었다고 집에만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언제든 나오셔서 배우고 익혔으면 좋겠어. 그리고 함께 무대에 서기를 바라.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거든. 나이 따지지 말고 오늘 당장 도전했으면 좋겠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