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4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광복군 합동묘소에 안장돼 있던 광복군 17위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 내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 묘역'에 개별 안장됐다. 해방 77년 만이다.
이들 광복군 선열들은 광복 후 따로 모실 공간이 없어 조계사 등에 임시 안치됐다가 추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묘소가 있던 수유리로 이장을 시작하면서 1961년 합동묘소를 조성했다. 이후 봉분 1기에 17위의 선열들을 함께 안장했다.
광복 직후에는 선열들을 모실 국립묘지가 없었고,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선열들이 젊은 나이에 순국해 후손도 없었기 때문에 지난 77년간 국립묘지로의 이장이 이뤄지지 않았다.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묘소에 안장됐던 광복군 17위 중 13명의 순국선열은 중국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전사하거나 처형됐고, 또는 자결했다. 4명의 애국지사는 광복 후 국내 등에서 작고했다.
김유신(1920년생, 1991년 애국장) 선열은 1942년에 광복군 제2지대 대부(隊附)로 공작활동에 나섰고, 1943년 2월 중국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상섭(1921년생, 1991년 애족장) 선열은 광복군 제5지대에 입대한 후 제2지대로 편입해 1943년 9월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김운백(1917년생, 1991년 애족장) 선열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돼 활동하던 중 1943년 9월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김성률(1920년생, 1991년 애족장) 선열은 광복군 제2지대 입대해 적 후방에서 공작하던 중 1943년 9월에 전사했다. 문학준(1910년생, 1991년 애족장) 선열은 광복군 제2지대에서 공작활동 및 정보수집 활동에 나섰고, 1943년 8월 중국 하남성 수무현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 김순근(생년미상, 1990년 애족장) 선열은 광복군 제3지대 입대했고, 1945년 2월 일본군에 체포돼 억류 중 자결했다.
백정현(1920년생, 1991년 애국장) 선열은 1942년 광복군 제2지대 대부(隊附)로 정보수집 활동에 나섰고, 1944년 4월 중국 북경감옥에서 순국했다. 안일용(1921년생, 1991년 애족장) 선열은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1944년 9월 중국 하남성 수무현에서 공작활동 중 순국했다.
김찬원(1917년생, 1991년 애국장) 선열은 1941년 광복군 제2지대 대부(隊附)로 공작활동에 나섰고, 1945년 8월 중국 산서성에서 지하공작 중 체포돼 순국했다. 이해순(1919년 생, 1991년 애국장) 선열은 광복군 제2지대 입대 후 중국 산서성에서 공작활동을 했고, 1945년 8월 중국 산서성 운성에서 공작활동 중 체포돼 순국했다.
전일묵(1920년생, 1991년 애족장) 선열은 광복군 제2지대 입대 후 중국 하북성에서 활동하다 1945년 8월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했다. 현이평(1913년생, 1995년 애국장) 선열은 중국 산서성에서 한국청년진지공작대를 창설했고, 1941년 1월 민족의식 고취 활동 중 피살됐다.
한휘(생년미상, 2022년 애족장) 선열은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중국 하북성, 하남성 등지에서 정보수집 및 초모공작 등을 전개해 조국독립에 기여했다. 1944년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휘 선열은 17위 중 가장 늦은 202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면서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다.
광복 후 작고한 애국지사로는 조대균(미상, 1990년 애족장), 이한기(1925~1949, 1990년 애족장), 동방석(1923~1971, 1990년 애족장), 이도순(1909~1969, 1990년 애족장) 지사가 있다. 조대균 지사는 1944년 9월에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하다 1945년 5월 입황특수공작훈련단 무전반에 편입되었다. 사망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귀국 후 작고했다.
이한기 지사는 1944년 9월에 광복군 3지대에 입대해 1945년 1월 화북지구 지하 공작대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5월 입황특수훈련단 무전반을 수료했으며 1949년 작고했다. 동방석 지사는 1943년 5월에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했고, 1944년에 특별 간부훈련반과 한미훈련반(OSS)을 수료했다. 1946년 귀국, 1971년 작고했다. 이도순 지사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입대 후 중국 산서성에서 공작활동에 나섰고, 1940년 9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해 해방될 때까지 활동했으며 1969년에 작고했다.
수유리 광복군 합동묘소에 안장돼 있던 광복군 17위의 유해는 8월 11일 합동묘소를 개장해 수습했다. 함께 안장돼 있던 17위의 유해는 오랜 세월에 안장자의 개별 표식이 사라져 신원을 특정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대전현충원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 묘역'에 세워진 17개의 묘비에는 모두 '수유리 한국광복군의 묘'라고 새길 수밖에 없었다.
대신 17위의 묘비 앞에 설치된 참배단에 선열들의 이름과 공적을 새겨 놓았다. 참배단에는 '수유리 한국광복군 선열 여기에 잠들다'는 글귀와 함께 수유리 한국광복군 묘비에 각인돼 있던 비문을 그대로 옮겨 새겼다.
"비바람도 찼어라 나라 잃은 나그네야 바친 길 비록 광복군이었으나 가시밭길 더욱 한이었다. 순국하고도 못 잊었을 조국이여 꽃동산에 뼈나마 여기 묻히었으니 동지들아 편히 잠드시라"
17위의 묘는 참배단 양 옆으로 각 1기식, 그 뒤로 5기씩 3열로 자리잡고 있다. 묘비의 뒷면에는 참배단에서 먼 왼쪽부터 122~126, 166~170, 209~213, 252~253의 번호가 4열로 부여돼 새겨져 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 가장 오른편으로 합동묘역을 조성하면서 묘판 내 안장 가능기수를 파악, 위치에 예정된 번호를 부여하다보니, 17위의 묘비 번호 모두 차례대로 되지 못한 것이다.
서울 수유리에 안장돼 있던 한국광복군 17위가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광복군은 총 360위로 늘어났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를 국립묘지로 이장해 오는 것도 필요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고 탄압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시키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다.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최소 29명 안장돼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실립니다.